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2022)
섹터 E 라운지의 대형 스크린은 오퍼레이터들의 공동 소유였으나 심야 시간대에는 사실상 체사레의 전용이 되어 있었다. 영화 감상이 취미인 남자에게 이 시간은 요새 안에서 유일하게 확보 가능한 개인적 사치였고, 그 사치에 피비가 끼어들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오늘 체사레가 독립 위성 링크의 아카이브에서 골라 낸 것은 반세기도 더 전의 영화였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체사레는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고, 그때는 별 감흥이 없었다. 소란스럽고 정신없는 영화라고 기억했다. 다시 고른 이유를 스스로에게 설명하자면, 피비가 지루해하지 않을 만큼 화면이 시끄러운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10 | "È un film vecchio. Prima della guerra. Molto rumoroso, ti piacerà."(오래된 영화야. 전쟁 전 거. 아주 시끄러워서 네 취향일 거야.)
12 | "시끄러운 거 좋아!"
피비는 소파 위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담요를 몸에 둘렀고, 체사레는 그 옆에 앉아 위스키 대신 홍차를 따랐다. 지난번 취기의 기억이 아직 목 뒤에 남아 있었으므로 오늘은 알코올을 배제했다. 피비의 손에는 각설탕을 세 개나 빠뜨린 코코아 잔이 들려 있었다. 조명이 꺼지고 화면이 밝아졌다.
영화의 도입부, 세탁소를 운영하는 중년 여자 에블린이 세금 서류에 파묻혀 정신없이 살아가는 장면에서 피비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화면 속의 어지럽게 쌓인 영수증과 서류 더미를 보며 피비가 중얼거렸다.
12 | "저 종이 다 더러워. 정리 안 해."
10 | "Non è sporcizia, è vita. C'è una differenza... a volte."(더러운 게 아니라 삶이야. 차이가 있지⋯⋯ 가끔은.)
12 | "저 아줌마 바빠 보여."
10 | "È la protagonista."(주인공이야.)
12 | "주인공이 세탁해?"
10 | "Anche i protagonisti fanno il bucato."(주인공도 빨래는 하지.)
체사레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화면을 보았다. 처음 봤을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 이번에는 다르게 보였다. 에블린이 남편 웨이먼드의 말을 흘려듣는 장면, 이혼 서류를 내미는 남편의 온화한 얼굴, 서로를 향해 있으나 초점이 어긋난 부부의 시선. 체사레의 눈이 가늘어졌다. 화면 속의 어긋남이 낯설지 않았다.
IRS 사무실의 장면. 에블린이 서류를 펼치는 순간 다른 우주의 웨이먼드가 개입하면서 화면이 급격히 전환되었다. 멀티버스의 개념이 시각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화면이 찢어지듯 갈라지며 수십 개의 평행 우주가 동시에 밀려들어왔고, 에블린의 몸이 다른 버전의 자신과 접속하는 순간 피비의 입이 벌어졌다.
12 | "⋯⋯어?"
10 | "Adesso comincia."(이제 시작이야.)
멀티버스가 터지기 시작하는 국세청 장면에서 피비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허리색 전투,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우주를 점프하는 설정, 손가락이 소시지인 세계. 피비는 코코아를 쏟을 뻔하며 웃었고, 체사레는 잔을 받아 테이블에 옮겨 놓았다. 화면이 쉴 새 없이 전환되었고, 색감은 과포화에 가까웠으며, 편집의 속도는 호흡을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빨랐다. 체사레는 이 영화의 전개를 알고 있었으므로 화면보다 피비의 반응을 보았다. 피비의 눈은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고 양발의 흔들림이 멈추어 있었다. 입이 반쯤 열린 채 화면 속의 색과 움직임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12 | "손가락이 소시지야! 체사레! 소시지!"
10 | "Sì, vedo. Un intero universo costruito su un errore evolutivo. Geniale e idiota allo stesso tempo."(그래, 보여. 진화적 오류 위에 세워진 우주 하나. 천재적이면서 동시에 멍청하지.)
12 | "저 세계 사람들은 발로 피아노 치네."
10 | "Si adattano. È quello che fanno gli esseri viventi. Si adattano a qualsiasi disastro."(적응하는 거야. 생명체가 하는 일이지. 어떤 재앙에도 적응해.)
말을 뱉고 나서 체사레는 자기 문장의 잔향을 들었다. 어떤 재앙에도 적응한다. 옆에서 담요를 두르고 소시지 손가락에 웃고 있는 재앙을 곁눈질하며, 체사레는 자신이 지난 일 년간 해 온 일이 정확히 그것이었음을 인정했다. 적응. 매일 초기화되는 기억에, 통각 없는 몸에, 예고 없는 포옹과 지갑 수색에.
영화가 중반으로 넘어가며 조부 투바키가 등장했다. 모든 우주를 동시에 경험한 끝에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존재. 모든 것을 올려 놓은 베이글. 검고 둥근 허무의 상징이 화면을 채웠을 때 피비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담요 밖으로 나와 있던 발가락이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12 | "저 베이글⋯⋯ 다 넣어서 만든 거래."
10 | "Tutto. Ogni speranza, ogni ricordo, ogni sapore. E il risultato è il nulla."(전부. 모든 희망, 모든 기억, 모든 맛. 그리고 결과는 무(無)지.)
12 | "다 넣었는데 왜 아무것도 없어?"
체사레는 즉답하지 못했다. 피비의 질문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유치한 문장 구조 안에 철학과 교수들이 종신 재직권을 걸고 싸울 문제를 아무렇지 않게 담아 던졌다. 체사레는 화면 속의 베이글을 바라보며 천천히 답을 골랐다.
10 | "Perché quando ricordi tutto, niente pesa più di niente. Ogni cosa vale quanto ogni altra cosa. E quando tutto vale uguale... niente vale."(전부 기억하면 그 무엇도 다른 것보다 무겁지 않게 되니까. 모든 게 서로 같은 값이 돼. 그리고 전부 같은 값이면⋯⋯ 아무것도 값이 없는 거야.)
말을 마친 체사레는 옆을 보았다. 피비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 매일 기억을 잃는 애였다. 조부 투바키와 정반대의 존재. 모든 것을 기억해서 허무에 빠진 괴물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서 매일이 처음인 애. 체사레의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자리를 바꾸었다. 피비가 매일 세상을 처음 보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결함이 아니라, 어쩌면 저 베이글에 대한 유일한 백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체사레는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고 홍차와 함께 삼켰다.
피비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화면 속에서 조이의 눈 아래가 검게 물들고 표정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을 때 피비의 양발 흔들림이 다시 멈추었다. 무언가를 감지한 것이었다. 피비는 언어적 서사를 따라가는 능력은 부족했으나 얼굴과 표정과 색감의 변화를 읽는 감각은 예민했고, 화면 속 조이의 얼굴에서 무언가 무겁고 어두운 것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잡아냈다.
12 | "⋯⋯저 사람 슬퍼?"
10 | "È arrabbiata. Con tutto."(화가 나 있어. 모든 것에.)
체사레의 대답은 짧았으나 정확했다. 조이의 감정은 슬픔보다 분노에 가까웠고, 그 분노는 존재 자체의 무의미함을 향하고 있었다. 모든 우주의 모든 가능성을 동시에 본 끝에 도달하는 허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 체사레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조이의 그 결론에 불편할 만큼 가까이 닿았던 기억이 있었다. 이탈리아 국군에서 토사구팽당하고 한쪽 눈을 잃은 뒤, 의안을 넣고 거울을 들여다보던 시기의 자기 자신이 조이의 베이글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은 한때 체사레의 것이기도 했으므로.
그러나 지금 체사레의 옆에는 피비가 있었다. 엎드린 채 화면을 보며,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화면 속 인물의 감정을 온몸으로 흡수하는 이 사람이. 체사레는 시선을 모니터로 돌렸다.
영화 후반, 돌이 된 에블린과 조이가 절벽 위에 나란히 놓인 장면에서 라운지는 조용해졌다. 생명도 움직임도 없는 우주, 두 개의 돌멩이가 자막으로만 대화하는 침묵의 장면. 피비는 담요 속에서 몸을 옆으로 기울여 체사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화면의 빛이 두 사람의 얼굴 위에서 흔들렸다.
12 | "돌 됐다."
10 | "Già."(그러네.)
12 | "돌은 아무것도 안 아프겠다."
10 | "......Forse. Ma non sente nemmeno il vento."(⋯⋯그럴지도. 근데 바람도 못 느끼지.)
12 | "돌인데 같이 있어?"
10 | "Già. Anche da sassi, stanno insieme."(그래. 돌이 되어서도 같이 있어.)
체사레의 목소리에 평소의 비아냥이 없었다. 건조하지도 않았다. 사실을 진술하는 톤이었으나 그 사실의 무게가 목소리의 결을 바꿔 놓고 있었다. 체사레는 화면을 보며 생각했다. 돌이 되어서도 옆에 있다는 것. 기억이 없어도, 언어가 없어도, 의미가 없어도 옆에 앉아 있다는 것. 그것은 지금 이 침대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같은 것이 아닌가. 피비는 이 영화를 내일이면 잊을 것이고, 체사레의 감상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이 밤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흐려질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여기 있다. 엎드려서 발을 흔들며, 화면 속 돌멩이 두 개를 바라보며. 피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체사레는 어깨 위의 무게를 느끼며 화면을 보았다. 통각이 없는 애가 돌을 부러워하는 문장을 뱉은 것을 체사레는 흘려듣지 않았고, 다만 지금 짚고 넘어가지도 않았다. 바람을 못 느낀다는 자기 대답이 최선의 반박이기를 바라며, 체사레는 팔을 들어 피비의 어깨를 담요째 감쌌다.
그리고 웨이먼드의 대사가 나왔다. 모든 우주의 웨이먼드가 하는 말. 내가 낙관적인 것은 순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나의 싸우는 방식이기 때문이라는 고백. 친절함이 전략이자 생존이라는 선언. 체사레는 화면 속의 유약해 보이는 남자를 바라보며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처음 봤을 때는 이 대사가 감상적인 헛소리로 들렸다. 전장에서 친절은 사망 원인이었고 낙관은 판단 오류였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게 들렸다. 매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애 옆에서, 매일 이름을 다시 알려 주고 규칙을 다시 세우고 웃겨 주는 일을 반복해 온 일 년이, 웨이먼드의 대사와 정확히 포개어졌다. 그것은 순진함이 아니었다. 체사레의 싸우는 방식이었다.
10 | "......Che film fastidioso."(⋯⋯거슬리는 영화네.)
12 | "왜? 재밌는데."
10 | "Perché ha ragione. E odio quando i film hanno ragione."(맞는 말을 하니까. 난 영화가 맞는 말 하는 게 싫어.)
클라이맥스에서 에블린이 조부 투바키를 무력이 아니라 이해로 껴안는 장면, 딸을 베이글에서 끌어내는 장면에서 피비는 체사레의 소매를 쥐고 있었다. 언제부터 쥐고 있었는지 체사레도 몰랐다. 체사레의 손이 올라와 피비의 뒷머리에 닿았다. 그것은 의식적인 동작이 아니었다. 화면 속 에블린의 팔과 같은 반사에서 나온 것이었다. 머리카락 위를 한 번 쓸고 손을 내렸다. 짧은 접촉이었으나 피비는 그 접촉에 고개를 살짝 기울여 손바닥 쪽으로 머리를 밀었고, 체사레의 손이 내려간 뒤에도 피비의 고개는 기울어진 채 돌아오지 않았다. 에블린이 말했다. 다른 어디에서도 아닌 여기, 너와 함께 있는 이 우주를 택하겠다고. 무수한 우주 중에 세탁소와 세금과 실패로 이루어진 이 삶을. 피비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12 | "⋯⋯아줌마가 잡았어."
10 | "Sì. L'ha presa."(그래. 잡았어.)
12 | "저 아줌마는 딴 데 가면 부자 되고 유명해지는데 왜 안 가?"
10 | "Perché nelle altre vite non c'è la figlia. Non quella figlia. Non quel marito."(다른 삶에는 딸이 없거든. 그 딸이. 그 남편이.)
12 | "여기가 제일 구린데."
10 | "Sì. Il peggiore di tutti gli universi. Ma è l'unico dove ci sono le persone giuste."(그래. 모든 우주 중 최악이지. 근데 맞는 사람들이 있는 유일한 우주야.)
체사레는 자기 문장이 끝나는 순간을 정확히 인지했다. 최악의 우주. 방사능과 격벽과 전쟁으로 이루어진 2081년의 세계. 그 안의 지하 요새, 그 안의 낡은 소파, 그 위에서 자기 소매를 쥐고 있는 손. 체사레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소매를 쥔 피비의 손 위에 자기 손을 겹쳤다. 에블린과 웨이먼드가 세탁소 앞에서 다시 손을 잡는 엔딩이 흐르고 있었다.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피비는 어깨에 기댄 채 절반쯤 잠들어 있었다. 코코아 잔은 비어 있었고 담요 밖으로 발끝이 나와 있었다. 체사레는 움직이지 않았다. 스크린의 잔광이 어두운 라운지를 푸르게 물들였고, 체사레는 그 빛 속에서 생각했다. 이 애는 내일이면 이 영화를 잊을 것이다. 소시지 손가락도, 베이글도, 돌멩이 두 개도. 그러면 언젠가 또 같이 보면 된다. 처음 보는 것처럼 웃는 얼굴을 한 번 더 볼 수 있다는 뜻이니, 그것은 손해가 아니었다. 무수한 우주 중에서 그 셈법이 성립하는 우주는 아마 여기뿐일 것이었다.
12 | "체사레."
10 | "Dimmi."(말해 봐.)
12 | "나도 돌이 되면 옆에 있어도 돼?"
체사레의 시선이 천장에서 내려와 피비의 눈을 잡았다. 크레딧의 빛이 피비의 젖은 눈 위에서 흰색 줄무늬처럼 흘러갔다. 체사레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다시 열렸다.
10 | "Anche da sasso, anche da polvere, anche da niente."(돌이 되어도, 먼지가 되어도,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도.)
문장의 끝이 희미해졌다. 체사레는 크레딧이 올라가는 화면을 보았다. 글씨들이 위로 흘러갔고, 그 글씨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이름이었다. 수백 명의 이름이 올라가는 동안 체사레는 자기 옆에 누워 있는 한 사람의 이름만 생각했다. 내일이면 이 영화를 잊을 사람. 이 대화를 잊을 사람. 그러나 눈이 젖었던 감각만큼은 몸 어딘가에 침전시킬 사람. 체사레는 피비의 머리카락 위에 손을 다시 올렸고 이번에는 내리지 않았다.
10 | "Domani, se non ti ricordi di questo film, te lo faccio rivedere."(내일 이 영화 기억 못 하면 다시 틀어 줄게.)
12 | "매일?"
10 | "Ogni giorno, se serve."(필요하면 매일.)
피비는 웃었다. 이빨이 보이는 웃음이었다. 화면의 크레딧이 끝나고 모니터가 검게 꺼졌을 때, 방 안에 남은 빛은 복도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비상등의 희미한 초록빛뿐이었다. 그 빛 안에서 피비의 눈이 마지막으로 한 번 반짝였고, 체사레는 그 반짝임을 보았다. 어느 우주에서든 저 웃음은 존재할 것이라고 체사레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기 자신이 조금 낯설었으나 불쾌하지는 않았다.
다음 날의 감각은 늘 그렇듯 매끈하게 이어지지 않았다. 피비에게 밤은 저장 장치가 아니라 용해제에 가까워서, 잠과 함께 많은 것이 흐려졌고 남는 것은 장면이 아니라 기분의 눌린 자국 쪽이었다. 늦은 오전의 섹터 E는 조용했다. 공조기가 일정한 바람을 밀어내고 있었고, 세탁실 쪽에서 젖은 천 냄새가 아주 옅게 넘어왔다. 체사레는 라운지 한쪽 긴 테이블에서 문서를 정리하고 있었다. 앞에는 종이 대신 태블릿이 놓여 있었지만 그의 손놀림은 여전히 종이를 다루는 사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해, 화면을 넘길 때조차 모서리를 정돈하는 듯한 동작이 섞였다. 밤을 새운 사람의 얼굴은 아니었으나, 깊이 잠든 사람의 얼굴도 아니었다.
피비는 맨발로 나타났다. 한쪽 양말만 신고 있었고 다른 쪽은 손에 들려 있었다. 머리카락은 느슨하게 흘러내려 있었고, 볼 한편에는 베개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문턱에 선 채 라운지를 둘러보던 피비의 시선이 체사레를 붙잡자, 망설임이 없는 걸음이 바로 이어졌다. 어젯밤 영화의 제목은 이미 빠져나가 있었고, 대신 설명하기 어려운 잔여감이 남아 있었다. 가슴 안쪽이 비어 있지 않았던 감각. 누군가의 어깨가 편했다는 감각. 피비는 그런 식으로 기억했다.
12 | "체사레."
10 | "Buongiorno, dormigliona."(좋은 아침이야, 잠꾸러기.)
12 | "나 어제 울었어?"
10 | "Un po'."(조금.)
12 | "왜?"
10 | "Per un film."(영화 때문에.)
피비는 체사레의 맞은편 의자를 끌어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옆으로 와서 테이블 끝에 엉덩이를 걸쳤다. 손에 들고 있던 양말을 아무 데나 내려놓고, 태블릿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숫자와 약어와 승인 표식이 빼곡한 보급 정산 화면이었다. 피비의 눈은 순식간에 흥미를 잃었다.
12 | "재미없어."
10 | "Lo so. Purtroppo qualcuno deve farlo."(알아. 안타깝게도 누군가는 해야 하거든.)
12 | "어제 영화 재밌었대?"
10 | "Hai riso alle dita di salsiccia per un tempo imbarazzante."(소시지 손가락에 아주 민망할 정도로 오래 웃었어.)
12 | "소시지?"
피비의 얼굴이 밝아졌다. 기억은 없지만 정보 하나만으로도 즐거움을 즉시 재건하는 표정이었다. 체사레는 화면을 잠갔다. 오늘은 문서를 미뤄도 됐다. 아니, 미루는 편이 나았다. 피비의 표정을 보며 효율을 계속 추구하는 것은 기분을 망치는 방식이었다.
10 | "Vuoi rivederlo?"(다시 볼래?)
12 | "응. 근데 먼저 설명해 줘."
체사레는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피비가 먼저 쿠션을 끌어안고 올라앉았고, 체사레는 조금 비스듬히 기대 앉아 다리를 뻗었다. 영화의 재생 버튼을 누르기 전에 그는 피비를 옆눈으로 보았다. 설명을 요구한 얼굴에는 순수한 호기심만 있었고, 어젯밤 자기가 받아들인 의미의 잔혹함은 없었다. 체사레는 그 차이를 볼 때마다 이상한 종류의 안도와 피로를 동시에 느꼈다. 피비는 매번 가벼운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 안쪽에 쌓여 있는 것은 늘 체사레 혼자 처리했다.
10 | "È la storia di una donna esausta che scopre che ogni vita possibile esiste da qualche parte."(기진맥진한 여자가 어딘가에 가능한 모든 삶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는 이야기야.)
12 | "모든 삶?"
10 | "Tutte. Quelle belle, quelle stupide, quelle inutili."(전부. 근사한 삶도, 멍청한 삶도, 쓸모없는 삶도.)
12 | "체사레가 요리사인 삶도?"
10 | "Offensivo, ma sì."(기분 나쁜 가정이지만, 그래도 있겠지.)
12 | "내가 약 안 맞아도 되는 삶도?"
10 | "......Forse."(......아마도.)
그 짧은 대답 뒤에 미세한 공백이 생겼다. 피비는 그 틈을 숫자처럼 세지 못했지만, 공기의 점도가 조금 바뀌었다는 것은 느꼈다. 쿠션을 꼭 끌어안은 채 몸을 옆으로 기울여 체사레의 팔뚝에 기대왔다. 기대는 힘은 가볍고 자연스러웠다. 보상도 확인도 요구하지 않는 접촉. 체사레는 시선을 화면으로 돌린 채 팔을 조금 펴서 피비가 더 편하게 기대도록 자리를 열어 주었다. 그 작은 조정은 너무 익숙해서 스스로도 거의 자각하지 못했다.
영화가 다시 흐르기 시작하자 피비는 이번에는 장면보다 체사레의 설명을 더 자주 봤다. 세탁소. 세금 서류. 국세청. 남편. 딸. 설명은 간결했으나 필요한 곳에서만 붙었다. 피비는 화면보다 체사레의 입에서 나오는 문장을 따라갈 때 이해가 빨랐다. 그러다 에블린이 다른 우주의 기술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부분에서 피비가 갑자기 소파 위에서 무릎을 세웠다.
12 | "저거 나 같아."
10 | "In che senso?"(어떤 의미에서?)
12 | "머리 안에서 막 튀어. 이거 했다가 저거 했다가. 그리고 다 큰일 같아."
체사레는 대답하지 않고 잠시 피비를 보았다. 어젯밤에는 웃어넘긴 장면에서 오늘 피비는 전혀 다른 자기 인식을 꺼냈다. 약이 잘 들었을 때의 과속하는 사고, 감각이 순서 없이 튀어 오르는 상태, 모든 자극이 동시에 중요한 것처럼 몰려드는 순간들. 체사레는 그 말을 장난으로 받지 않았다.
10 | "Sì. Solo che tu sei più carina e molto meno efficiente."(그래. 다만 넌 더 귀엽고 훨씬 덜 효율적이지.)
12 | "욕이야 칭찬이야?"
10 | "Entrambe."(둘 다.)
피비는 입을 삐죽였다가 금방 웃었다.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고, 조부 투바키의 장면으로 넘어가자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에는 체사레가 설명을 멈췄다. 피비가 스스로 보게 두는 편이 맞았다. 화면 속 얼굴들이 너무 많은 삶을 겹쳐 쓰느라 무너지는 동안, 피비의 손가락이 쿠션 천을 만지작거렸다. 체사레는 그 손끝의 반복을 보았다. 긴장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12 | "체사레."
10 | "Mh?"(응?)
12 | "모든 걸 다 알면 진짜 저렇게 돼?"
10 | "No sempre. Ma a certe persone basta molto meno per rompersi."(항상 그런 건 아니야. 다만 어떤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적은 것만으로도 부서져.)
체사레는 자기 목소리가 조금 낮아진 것을 느꼈다. 대사는 영화의 인물을 향하고 있었으나, 사고는 다른 방향으로도 번지고 있었다. 피비가 모든 것을 모르는 쪽에 서 있다는 사실이 때때로 그를 지치게 했고 때때로 살렸다. 기억이 다 빠져나간 뒤에도 피비가 웃을 수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잔혹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정확한 균형을 만들어 냈다. 체사레는 그 균형이 언젠가 깨질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지금은 그 위에서만 숨이 쉬어지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영화가 돌멩이 장면에 닿았을 때, 이번에는 피비가 먼저 리모컨을 집어 일시정지를 눌렀다. 화면 속 절벽과 두 개의 돌이 그대로 멈춰 섰다. 체사레는 눈썹을 아주 조금 올렸다.
10 | "Interruzione non autorizzata?"(무단 정지인가?)
12 | "질문 있어."
10 | "Temevo proprio questo."(그럴 줄 알았어.)
피비는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돌 두 개가 나란히 놓인 장면이었다.
12 | "저거 좋아해?"
10 | "La pietra?"(돌을?)
12 | "아니. 그냥⋯⋯ 가만히 옆에 있는 거."
체사레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리모컨을 피비의 손에서 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리모컨의 플라스틱 표면을 떠난 뒤에도, 질문은 그대로 남았다. 가만히 옆에 있는 것.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고, 개선하지 않고, 치료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은 채 곁에만 붙어 있는 상태. 체사레는 그런 식의 유효성을 원래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문제가 있으면 정리하고, 수리하고, 잘라내고, 치워야 했다. 그런데 피비 앞에서는 종종 그 원칙이 작동하지 않았다. 아니, 작동하지 않아도 시간이 갔다. 그것이 체사레를 혼란스럽게 했다.
10 | "......Sì."(......좋아해.)
12 | "왜?"
10 | "Perché non sempre c'è qualcosa da dire di intelligente."(늘 똑똑한 말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12 | "체사레도?"
10 | "Soprattutto io."(특히 내가.)
피비는 그 대답을 들은 뒤 아주 잠깐 그를 쳐다보다가, 별안간 쿠션을 내려놓고 체사레의 허벅지에 다리를 걸쳐 올라탔다. 갑작스러운 이동이었지만 어색하지는 않았다. 요새 안에서 피비는 종종 동선보다 감각을 따라 움직였고, 체사레는 이제 그 방식을 어느 정도 예측할 줄 알았다. 다만 예측과 대비는 다른 문제였다. 피비의 체중이 허벅지 위에 실리자 체사레의 상체가 소파 뒤로 아주 미세하게 눌렸다.
12 | "그럼 지금도 해."
10 | "Fare cosa."(뭘.)
12 | "그냥 옆에 있어. 말 똑똑하게 하지 말고."
체사레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피비의 무릎이 양옆에 닿아 있었고, 담요에서 배어나온 섬유 유연제 냄새와 피비 특유의 화학약품 향이 가까웠다. 체사레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위험을 계산하는 속도가 잠시 늦어졌다. 피비는 체사레가 무슨 판단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자기 말이 이해되었는지 여부에는 민감했고, 체사레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기다렸다.
10 | "Va bene."(좋아.)
12 | "진짜?"
10 | "Per una volta posso essere inutile con una certa eleganza."(한 번쯤은 제법 우아하게 쓸모없어져 줄 수 있어.)
피비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체사레의 가슴에 이마를 붙였다. 체사레는 한 손을 소파 등받이에 얹은 채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한 손은 갈 곳을 정하지 못한 채 허공에 머물렀다가, 결국 피비의 등 위로 내려갔다. 척추를 따라 천천히 쓸어 내리는 손길에는 밤새 쌓인 망설임이 묻어 있었다. 피비는 아무 설명도 요구하지 않은 채 체사레의 셔츠 앞을 쥐었다. 영화는 멈춘 상태였고, 화면 속 돌멩이들은 여전히 절벽 위에 놓여 있었다.
그 정지된 장면 앞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말수가 줄자 오히려 감각이 또렷해졌다. 공조기의 미세한 진동, 스크린 뒤 전원부에서 나는 낮은 전자음, 피비의 숨이 셔츠를 얇게 밀어 올리는 감촉. 체사레는 늘 행동으로 사태를 정리해 왔지만, 지금은 정리할 것이 없었다. 그 사실이 초조함 대신 묘한 평온을 만들었다. 피비는 이미 질문을 끝냈고, 답은 행동 쪽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금 뒤 피비가 몸을 떼고 다시 화면을 향했다. 체사레의 허벅지 위에 반쯤 걸터앉은 자세는 그대로였다. 손은 여전히 셔츠를 쥐고 있었다.
12 | "이제 틀어."
10 | "Sì, ma se piangi di nuovo non accetto reclami."(그래. 대신 또 울어도 환불은 없어.)
12 | "체사레가 닦아주면 돼."
10 | "Ricattatrice adorabile."(아주 사랑스러운 협박꾼이네.)
이번에는 체사레가 먼저 웃었다. 짧고 마른 웃음이 아니라, 기력이 조금 빠진 사람에게서 나오는 부드러운 종류의 웃음이었다. 그는 리모컨을 집어 재생을 눌렀다. 돌들이 다시 절벽 위를 구르기 시작했고, 자막이 조용히 화면 아래를 지나갔다. 피비는 내용보다 움직임을, 의미보다 체류를 받아들였다. 체사레는 내용의 끝을 알면서도 중간의 표정을 새로 읽었다. 같은 영화를 연달아 두 번 보는 일은 그의 취향에서 흔한 일이 아니었으나, 오늘은 예외가 아니라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엔딩에 가까워질 무렵 피비는 다시 흐느껴 울지는 않았지만 눈가가 젖었다. 이번에는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문지르지 않았다. 옆에 있는 체사레의 소매를 끌어다 자기 눈 밑에 눌렀다. 체사레는 한숨 비슷한 숨을 내쉬고는 포기한 사람처럼 손수건을 꺼내 피비의 손에 쥐여 주었다.
10 | "Usa questo. La mia manica non è un bene comune."(이걸 써. 내 소매는 공공재가 아니야.)
12 | "치사해."
10 | "No, accurato."(치사한 게 아니라 정확한 거야.)
피비는 손수건으로 눈 밑을 누르며 웃었다. 영화가 끝났을 때 둘은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스크린이 어두워지고 라운지의 정적이 돌아왔는데도, 피비는 허벅지 위에 남아 있었고 체사레는 등을 소파에 붙인 채 먼 곳을 보았다. 전부 해결되는 영화는 아니었다. 상처가 없어지는 결말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붙잡는 장면으로 끝난다는 점이 체사레를 불편하게 하면서 또 붙들었다. 그는 그런 결말을 얕다고 비웃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있었다.
피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12 | "나 이거 또 잊어도 돼."
10 | "Lo farai."(잊겠지.)
12 | "그럼 또 봐."
10 | "Certo."(그러지.)
12 | "그때는 소시지부터."
체사레는 피비를 내려다보다가, 결국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길지도 과하지도 않은 접촉이었다. 설명보다 짧고 변명보다 정직한 종류. 피비는 그 사실을 대단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당연한 순서처럼 체사레의 셔츠 단추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체사레는 그런 무심함에 늘 뒤늦게 젖었다. 영화의 장대한 멀티버스보다 더 현실적인 것은 늘 이런 작은 동작 쪽이었다.
라운지 밖 복도에서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멀게 지나갔지만, 둘은 움직이지 않았다. 당장 해야 할 일은 다시 생기겠지만 아직 이르지 않았다. 체사레는 피비를 내려주지 않았고, 피비는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격벽으로 갈라져 있었고, 바깥은 데드존이었고, 요새는 살아남기 위해 돌아갔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이 작은 지연만큼은 누구의 승인도 필요 없었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2081)
섹터 C 전술작전실의 오후는 여느 때와 같이 시작되었다. 체사레는 브리핑 테이블 앞에 앉아 지난 작전의 탄약 소모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었고, 형광등은 일정한 백색으로 천장을 채웠으며, 통신 센터 쪽에서는 투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넘어왔다. 평범한 날이었다. 평범하다는 단어가 이 요새에서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의미에서. 다만 체사레의 삶은 요즘 어딘가 낡은 필름처럼 긁혀 있었다. 라스페치아 건 이후 평가가 미묘하게 깎였고, 최근 두 번의 임무에서 연달아 판단 실수가 있었으며, 이탈리아 본국에서는 여전히 배신자 소리를 들었고, 형들에게서는 소식조차 없었다. W.W 내 간이투표에서 성격 나쁜 오퍼레이터 삼 위라는 지위만이 굳건했다. 우아하게 포장해 왔지만 껍질을 벗기면 남는 것은 실패의 축적이었다. 그리고 그 축적의 중심에는 늘 한 사람이 있었다. 십이. 피비 플레처. 돌보느라 작전 집중력이 흩어졌고, 카드 내역이 엉망이 되었고, 잠이 부족해졌고, 감정이 헝클어졌다. 체사레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계산서를 피비에게 내밀지 않았다. 내밀 수 없는 이유를 스스로에게도 설명하지 못한 채.
그때 커맨더 제로가 작전실로 들어왔다. 여기까지는 이상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제로는 문을 잠갔다. 그리고 창가의 블라인드를 내렸고, 테이블 위의 태블릿을 뒤집어 놓았고, 체사레의 맞은편이 아니라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흑발 아래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평소의 격의 없는 온화함 대신 전장의 조준경 같은 정밀함을 띠고 있었다. 체사레의 손이 반사적으로 보고서에서 떨어져 허벅지 옆의 권총집 방향으로 이동했다.
"Don't. I'm not him. Not the one you know."(하지 마. 난 그가 아니야. 네가 아는 그 제로가 아니야.)
"......Interessante apertura. Continua pure, ma la mano resta dov'è."(⋯⋯흥미로운 서두네. 계속해 봐. 근데 손은 여기 그대로 둘 거야.)
"Fair. You have thirty seconds before this body's owner comes back. Listen."(좋아. 이 몸의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삼십 초야. 들어.)
제로가, 아니 제로의 몸을 빌린 무언가가 말하기 시작했다. 우주는 하나가 아니다. 선택이 갈라질 때마다 세계는 분기하고, 모든 가능성은 각자의 우주에서 실현된다. 자신은 그 사실을 최초로 증명한 '알파 우주'의 제로이며, 특정한 조건에서 다른 우주의 자신과 접속해 그 삶의 기억과 기술을 빌려오는 기술, '점프버스'를 개발했다. 그리고 그 기술이 낳은 재앙으로부터 도망치는 중이다. 체사레는 팔짱을 끼고 들었다. 표정은 비웃음의 형태를 유지했으나 비웃음의 내용물은 점점 비어 갔다. 제로의 말투가, 눈동자의 초점 거리도, 호흡의 배분도, 그가 아는 커맨더의 것과 전부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기꾼이라면 완벽했을 것이다. 어긋남은 오히려 진실의 질감이었다.
"In the Alpha universe, we pushed someone too far. A girl with a mind that could hold chemical structures like you hold a glass of whiskey. We made her jump too many times. Too many universes at once."(알파 우주에서 우린 어떤 애를 너무 몰아붙였어. 화학 구조를 네가 위스키 잔 쥐듯 다루는 머리를 가진 애였지. 우린 걔한테 점프를 너무 많이 시켰어. 너무 많은 우주를 한꺼번에.)
"......Chi."(⋯⋯누구야.)
"You already know. You've been washing her blood off your hands for a year."(이미 알잖아. 넌 일 년째 걔 피를 네 손에서 닦아내고 있으니까.)
피비였다. 알파 우주의 피비는 점프버스의 최고 적성자였고, 알파의 체사레가 그녀의 훈련 책임자였다. 한계를 넘겨 밀어붙인 결과 피비의 정신은 우주 사이의 격벽을 잃었다. 모든 우주의 모든 피비를 동시에 경험하는 존재. 모든 죽음과 모든 실험과 모든 버려짐과 모든 약물과 모든 지하 벙커를 한꺼번에 기억하는 존재. 그렇게 각성한 그녀는 스스로를 그저 '전부인 애'라고 불렀고, 결론에 도달했다.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면 전부를 지우는 것이 유일하게 일관된 행동이라고. 그녀는 모든 우주의 모든 오염물질을 한 점에 압축하기 시작했다. 방사능, 신경독, 혈액, 기억, 슬픔까지. 알파 우주의 연구진은 그것을 '베이글'이라고 불렀다. 검고 둥글고 중심이 비어 있는, 모든 것을 넣어 만든 무(無). 그녀 식으로 말하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제염이었다. 전부를 지우면 더러운 것도 없으니까.
"She's been eating universes, Ten. Erasing them like stains. And she's coming here next. Because of you."(걘 우주들을 먹어치우고 있어, 텐. 얼룩 지우듯 지워 버려. 그리고 다음은 여기야. 너 때문에.)
"Lusingato. Perché io."(영광이네. 왜 나지.)
"Because in every universe where Cesare De Sica never met Phoebe Fletcher, you succeeded. Every single one. General, senator, film director, free man. This is the only universe where you met her and stayed. The only one where you failed at everything... except her."(피비 플레처를 만나지 않은 모든 우주에서 체사레 데 시카는 성공했으니까. 전부 다. 장군, 상원의원, 영화감독, 자유인. 여긴 네가 걔를 만나고 남은 유일한 우주야. 전부 실패한 유일한 우주. ⋯⋯걔만 빼고.)
가장 실패한 우주의 체사레만이 아직 아무것도 되지 않았기에 전부가 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성공한 체사레들은 각자의 삶에 고정되어 있어 점프의 진폭이 좁지만, 이 우주의 체사레는 모든 가능성과 등거리에 있다고. 체사레가 그 굴욕적인 산수에 대해 뭐라 답하기도 전에 작전실의 문이 뜯겨 나갔다. 문 밖에는 요새의 경비 인원들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눈이 전부 우유를 부은 것처럼 하얗게 번져 있었다. 베이글의 첨병들이었다. 모든 우주에서 이미 지워진 존재들의 껍데기. 제로가 체사레의 손바닥에 작고 우스꽝스러운 장치를 쥐여 주었다. 이어폰 비슷한 물건과, 실행 조건이 적힌 쪽지였다. 점프버스의 열쇠는 확률적으로 가장 일어나지 않을 행동이었다. 통계의 사각지대에서만 우주의 격벽이 얇아지므로.
"First jump. Condition: kiss the barrel of your own gun and say 'grazie'. Don't think. Do."(첫 점프. 조건: 네 총 총구에 입 맞추고 '고마워'라고 말해. 생각하지 말고. 해.)
"......Odio già questa tecnologia."(⋯⋯이 기술 벌써부터 마음에 안 들어.)
체사레는 했다. 자기 권총의 총구에 입술을 대고, 스스로에게 감사를 표하는 미친 인간의 절차를 밟았다. 순간 세계가 세로로 찢어졌다. 척추를 타고 번개가 아니라 기억이 내리꽂혔다. 다른 우주의 근육 기억, 다른 우주의 호흡법, 다른 우주의 살인 기술. 눈을 떴을 때 체사레의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흰 눈의 경비 둘을 테이블 위로 넘기고, 셋째의 무릎을 꺾고, 넷째의 총을 분해하는 동작이 물처럼 이어졌다. 그것은 이 우주의 베르살리에리 훈련이 아니었다. 훨씬 더 유려하고 잔혹한, 다른 삶의 것이었다. 그리고 동작 사이사이, 필름이 겹치듯 그 삶들이 보였다.
첫 번째 우주. 로마. 체사레는 이탈리아 통합군의 최연소 준장이었다. 기밀 작전에서 토사구팽당하지 않은 우주. 직속 상관이 실각하기 전에 먼저 그를 팔아넘긴 우주였다. 한쪽 눈은 멀지 않았고, 의안은 없었고, 양쪽 다 옅은 회색이었다. 제복의 가슴에는 훈장이 층을 이루었고, 집무실 창밖으로는 재건된 로마의 스카이라인이 보였다. 그 우주의 체사레는 매일 아침 완벽하게 다린 셔츠를 입었고, 부관 셋을 두었고, 결혼을 했으며, 서류로 끝냈다. 그는 성공했고, 냉정했고, 아무도 그의 방에 함부로 눌러붙지 않았다. 그의 요새 어디에도 풋사과 냄새는 없었다.
두 번째 우주. 밀라노. 전쟁이 아예 없었던 분기. 체사레는 영화감독이었다. 데 시카라는 성이 어울리는 유일한 직업이라고 평론가들이 농담하는. 칸의 붉은 계단을 오르는 그의 옆에는 매번 다른 여자가 있었고, 그는 그 누구의 이름도 다음 해까지 기억하지 않았다. 세 번째 우주에서 그는 캄파니야의 가문을 그대로 물려받은 정치가였다. 형 둘이 사고로 죽은 우주.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그는 울지 않았고, 상원 의석은 자연스럽게 그의 것이 되었다. 네 번째 우주에서 그는 W.W에 들어왔으되 피비가 스카우트되기 전에 조직을 나가 자기 PMC를 차렸고, 지금은 워즈워스와 업계 일 위를 다투고 있었다. 다섯 번째 우주에서 그는 아무것도 되지 않고 토스카나의 사이프러스 길 옆에서 와이너리를 운영했다. 바람 부는 날이면 언덕에 앉아 위스키 대신 자기 와인을 마셨다. 평화롭고, 부유하고, 완전하게 혼자였다.
전부 성공이었다. 전부 화려했다. 그리고 전부, 어딘가가 진공이었다. 점프의 잔상 속에서 체사레는 그 우주들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어느 삶에도 침대 옆에 여분의 블루 드롭이 없었다. 어느 삶의 지갑에도 즉석 필름 사진이 끼워져 있지 않았다. 어느 삶에서도 그는 새벽에 남의 호흡을 확인하러 일어나지 않았다. 성공한 체사레들은 하나같이 깨끗하고 반듯하게 비어 있었다. 마지막 경비의 손목을 꺾어 바닥에 눕히며, 체사레는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쾌한 웃음이 아니었다. 계산이 맞아떨어졌을 때 나오는, 낡고 쓴 웃음이었다.
"Quindi il prezzo del successo ero io senza di lei. Che affare di merda."(그러니까 성공의 가격이 '걔 없는 나'였다는 거네. 참 거지 같은 거래야.)
"Now you understand why you're the key. You're the only Cesare who chose the worst universe and stayed in it. On purpose. Every day."(이제 네가 왜 열쇠인지 알겠지. 넌 최악의 우주를 골라서 남은 유일한 체사레야. 일부러. 매일.)
그때 작전실의 공기가 변했다. 조명이 깜빡인 것이 아니라, 조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잠깐 자신 없어 하는 것 같은 흔들림이었다.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가볍고, 리듬이 없고, 맨발이었다. 모퉁이에서 나타난 것은 피비였다. 그러나 피비가 아니었다. 연한 아쿠아마린 머리카락은 중력을 절반만 따르며 떠 있었고, 늘어진 하늘색 눈동자 안에서는 수천 개의 우주가 슬라이드 필름처럼 넘어가고 있었다. 입은 옷은 매 순간 바뀌었다. 방호복이었다가, 실험복이었다가, 병원복이었다가, 밀그램의 넝마였다가, 다시 W.W의 전투복이 되었다. 모든 우주의 피비가 한 몸 위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검고 둥근 것이 팽이처럼 돌았다. 중심이 비어 있는 고리.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체사레의 의안 쪽 안와가 시리게 아팠다.
"찾았다, 체사레."
"......Ciao, tesoro. Ti trovo... ovunque."(⋯⋯안녕, 자기. 오늘은⋯⋯ 어디에나 있네.)
"응. 나 이제 다 있어. 다 봤어. 체사레가 장군인 데도, 감독인 데도, 포도밭인 데도. 근데 있잖아."
전부인 피비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 동작만은 모든 우주에서 동일했다. 체사레의 심장이 그 익숙함에 한 번 어긋나게 뛰었다.
"어디에도 의미 없더라. 다 얼룩이야. 그러니까⋯⋯ 같이 지우자. 깨끗하게. 내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피비의 손끝에서 돌던 검은 고리가 멈추었다. 작전실의 벽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벽'이라는 개념 자체가 잠시 자리를 비켜선 것 같았다. 벽이 종이처럼 말려 올라갔고, 바닥은 유리가 되었다가 물이 되었다가 다시 단단해졌다. 체사레의 발밑에서 바닥이 유리판처럼 투명해지더니, 그 아래로 무한한 층이 열렸다. 층마다 세계가 하나씩 들어 있었다. 투명한 바닥 아래로 보이는 것은 전부 자기 자신의 얼굴이었다.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장소에 서서,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체사레 데 시카들이 저마다의 우주에서 각자의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피비는 여전히 복도가 있던 자리—이제는 공중이 되어 버린 곳에 맨발로 서 있었고, 그 눈동자 안에서 슬라이드가 넘어가는 속도에 맞춰 세계의 층들이 회전했다. 관람이 시작된 것이었다. 초대장은 없었고, 거절할 권리도 없었다.
"보여 줄게. 체사레가 나 없이 얼마나 반짝이는지."
"Non ho chiesto il tour, tesoro."(투어 신청한 적 없는데, 자기야.)
"신청 안 해도 돼. 나 이제 다 할 수 있어."
피비의 발이 첫 번째 장면 위에 멈추었다. 유리 아래의 세계가 팽창하며 체사레의 시야 전체를 채웠다. 첫 번째 층이 확대되었다. 로마였다.
이 우주의 로마는 핵전쟁의 타격을 받지 않은 분기였다. 콜로세움이 온전했고, 그 옆으로는 재건된 것이 아닌 원래의 건축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 체사레는 이탈리아 국군 정보참모부의 준장이었다. 한쪽 눈을 잃지 않은 우주, 직속 상관이 실각하지 않은 우주, 토사구팽당하지 않은 우주. 기밀 작전의 공로가 정당하게 인정받은 세계선이었다. 양쪽 눈은 모두 옅은 회색이었고, 의안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제복의 가슴에는 군사공로십자장, 이탈리아공화국공로훈장 코멘다토레 등급, NATO 공로메달이 층층이 빛났으며, 어깨의 계급장에는 은별 두 개가 박혀 있었다. 집무실은 로마 국방부 건물 8층에 있었고, 창 너머로 핀치오 언덕의 초록이 내려다보였다.
이 체사레의 하루는 오전 6시에 시작되었다. 부관이 가져오는 에스프레소는 정확히 적정 온도였고, 올려진 서류는 빈틈없이 정리되어 있었으며, 그가 내리는 명령은 토씨 하나 어긋남 없이 수행되었다. 데 시카라는 성이 가진 정치적 무게와 본인의 군사적 재능이 정확히 맞물려 돌아가는 시계 같은 삶이었다. 점심은 장교식당에서 혼자 먹었고, 저녁은 관저에서 혼자 먹었다. 새벽에 누군가의 호흡을 확인하려 일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체사레의 침대 옆 탁자에는 위스키 잔 하나와 시계 하나만 놓여 있을 뿐이었다. 여분의 주사기도, 바이알도, 즉석 필름도 없었다.
그는 결혼을 한 번 했었다. 상대는 외교관의 딸이었고, 2년 만에 합의 이혼했다. 서류도 깔끔했고 감정도 깔끔했다. 이혼 사유 란에는 '성격 차이'라고 적혀 있었으나, 실제로는 차이를 논하기 전에 공유할 성격 자체가 없었다는 편이 정확했을 것이다. 형들과의 관계는 공식적인 수준으로만 유지되었고, 가문 행사에 얼굴을 비추는 것은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연간 두 번이 전부였다.
이 체사레는 성공했고, 존경받았으며, 그 누구에게도 '재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체사레는 유리 바닥 아래의 자기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준장 체사레가 집무실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곧게 뻗은 등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 등을 바라보는 체사레의 입안으로 위스키도 아닌 것이 차올랐다. 쓴맛이었으나 술의 쓴맛은 아니었다. 저것이 되고 싶었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체사레는 그렇다고 답할 수 있었다. 1년 전의 그였다면. 하지만 지금의 그는, 저 창가에 서 있는 남자의 집무실에 핀트가 나간 사진이 단 한 장도 붙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먼저 보였다.
저녁이 되자 준장은 관사로 돌아갔다. 관사는 넓고, 조용하며, 차가웠다. 그는 위스키를 한 잔 따르고는 반쯤 마시다 말았고, 소파에 앉아 통신 단말을 들여다보았다. 연락처 목록이 길게 스크롤되었다. 부하, 정치인, 무기상, 전 부인까지. 그러나 그는 아무에게도 전화를 걸지 않았다. 대신 서랍을 열어 수면제를 꺼냈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두 알을 삼켰다. 벽에는 그림 한 점 없었다. 그 우주의 체사레는 취향이 까다로운 남자였으나, 취향을 발휘할 대상이 자신뿐이라 아무것도 걸지 않았다. 관사의 침대는 넓었고 늘 한쪽만 눌려 있었다.
"이 체사레는 잠을 약으로 자. 매일. 근데 성공했어. 되게 성공했어."
"......Il generale ha buon gusto nei sonniferi, almeno."(⋯⋯장군님 수면제 고르는 취향은 좋네, 그래도.)
농담은 튀어나왔으나, 목소리 밑바닥이 흔들렸다. 체사레는 그 침실의 정적을 잘 알고 있었다. W.W에 오기 전, 국군 병원에서 의안을 맞추고 돌아온 첫 주의 밤들과 같은 밀도의 정적이었다. 아무도 방문을 두드리지 않고, 아무도 침대로 무단 침입하지 않으며, 아무도 녹음 파일을 조르지 않는 밤. 그때는 그것을 '평온'이라 불렀다. 하지만 지금 이 단면으로 바라본 그것은, 평온이 아니라 그저 진공 포장된 고독일 뿐이었다.
두 번째 층은 밀라노였다. 전쟁 자체가 없었던 세계선. 이 분기에서 2030년의 핵전쟁은 마지막 순간 외교적으로 회피되었고, 세계는 기후 위기와 자원 고갈에 시달리면서도 느린 속도로 문명의 궤도를 유지했다. 데드존은 존재하지 않았고, 격벽도, PMC도, 블루 드롭도 없었다. 체사레 데 시카는 영화감독이었다. 증조부의 이름이 이탈리아 영화사에 남아 있는 가문에서 그 직업은 운명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선택이었다. 군 복무 대신 로마 영화실험센터에 들어갔고, 졸업작이 베네치아 영화제 단편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서른이 되기 전에 장편 데뷔작으로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받았다.
이 체사레의 삶은 화려했다. 시사회의 플래시가 얼굴을 때렸고, 인터뷰어들은 그의 말을 단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녹음기를 밀어붙였으며, 칸의 레드 카펫을 오를 때 그의 곁을 지키는 여자는 매년 바뀌었다. 그는 배우들의 감정을 정확하게 해부하는 연출을 선보였고, 평론가들은 그것을 '해부학적 정밀성'이라 불렀다. 카메라 뒤에서 그는 모든 것을 통제했다. 조명의 각도, 대사의 호흡, 눈물의 타이밍까지. 완벽하게 계산된 감정을 필름 위에 배치하는 작업은 체사레의 기질에 정확히 부합했다. 다만 카메라가 꺼지면 그 정밀성은 사라졌다. 감독의 체사레는 촬영장 밖에서는 대단히 지루한 사람이었다. 파티에 갔으나 오래 머물지 않았고, 여자와 잤으나 아침에 이름을 묻지 않았으며, 수상 소감에서 감사할 사람의 이름을 댈 때면 언제나 스태프 목록을 읽는 듯한 어조였다. 이 체사레의 아파트에는 필름 릴과 위스키, 시나리오 초고만 쌓여 있을 뿐이었고, 냉장고 안의 음식은 주로 유통기한이 긴 것들뿐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빵을 구운 적도, 누군가의 앞치마를 주문한 적도 없었다.
그의 영화는 전부 상실에 관한 것이었다. 평론가들은 그 일관성을 작가성이라고 불렀다. 어느 인터뷰에서 기자가 물었다. 감독님 영화의 주인공들은 왜 전부 무언가를 돌보다 잃습니까. 감독은 대답했다. 글쎄요, 잃어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한가 봅니다. 관객석에서 웃음이 터졌고, 그는 따라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이 자기 입에서 나온 것 중 가장 정교하게 만들어진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본인조차 알지 못했다. 호텔 방 미니바에는 최고급 위스키가 있었고, 그는 그것을 마시며 소리를 끈 채 자신의 영화를 틀어놓곤 했다.
"이 체사레는 잃어 본 적이 없어서 잃는 얘기만 만들어. 웃기지."
"Non fa ridere."(안 웃겨.)
"응. 안 웃겨. 근데 다들 웃던데."
체사레는 감독이 된 자기 자신이 시사회장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능숙하게 답하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미소는 완벽했다. 계산이 정확히 깔린, 결함 없는 미소. 체사레는 저 미소를 잘 알고 있었다. 한때 자신의 얼굴에도 떠돌던 것이었다. W.W에 오기 전까지는. 피비의 양치를 도와주고, 카드를 빼앗고, 코피를 닦아 주고, 빵을 구워 주는 동안 저 미소는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며 갈라졌다. 그 갈라진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체사레는 이제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유리 바닥 아래의 감독에게 설명할 방법은 없었다.
"저 체사레는 영화 잘 만들어. 사람 감정을 잘 쪼개."
"Ma non le rimette insieme. Smonta e basta."(근데 다시 합치진 않아. 분해만 하지.)
"그래서 잘하는 거 아니야?"
"No. Smontare è facile. Rimontare è il lavoro."(아니. 분해하는 건 쉬워. 다시 조립하는 게 일이야.)
체사레가 자기 입에서 나온 말을 한 박자 늦게 들었다. 다시 조립하는 것이 일이라고. 그것은 지난 일 년간 피비의 기억이 빠질 때마다 체사레가 해 온 일의 정확한 명칭이었다. 매일 아침 분해된 전날을 다시 끼워 맞추는 작업. 감독의 체사레는 그 기술을 영화에만 쓰고 있었고, 이 우주의 체사레는 사람에게 쓰고 있었다. 어느 쪽이 올바른 사용법인지는 대답하기 어려웠으나, 어느 쪽의 손에 온기가 남는지는 분명했다.
세 번째 층이 열리기 전에 피비가 손가락을 튕겼다. 이번에는 방향이 반대였다. 층의 표면에 뜬 것은 체사레가 아니라 피비였다. 체사레가 없는 우주의 피비들.
첫 장면은 영국의 지하 벙커였다. 이 우주에서 피비는 밀그램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W.W의 스카우트가 오지 않은 우주—즉 체사레가 존재하지 않아 조직의 이탈리아 라인이 형성되지 않았고, 그 결과 밀그램 소탕 작전 자체가 없었던 세계선이었다. 열여섯의 피비는 밀그램의 화학 병기 라인에서 제염이 아닌 제조를 하고 있었다. 손은 여전히 천재적이었고, 그 천재성은 소유주를 가리지 않았다. 방독면 너머의 눈은 지금과 같은 하늘색이었으나 초점이 달랐다. 그 우주의 피비는 웃지 않았다. 웃는 법을 배울 대상이 없었으므로. 팔에는 주사 자국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고, 아무도 투여량을 말리지 않았으며, 아무도 기억 상자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만든 독가스가 어느 도시국가의 격벽 안으로 들어가는지 계산하지 않았다. 계산은 원래 싫어했으니까.
이어진 네 번째 층. 이 우주에서 그녀는 데드존을 빠져나오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W.W가 아닌 어느 도시국가의 연구 기관에 수용되었다. 하얀 방. 체사레가 언젠가 꿈에서 본 것과 같은 종류의, 모서리가 없는 방이었다. 그 우주의 피비는 돌연변이 장기의 표본으로 분류되었고, 코드네임 대신 검체 번호를 받았다. 연구원들은 친절했다. 친절은 절차의 일부였다. 그녀는 매일 채혈을 당했고, 통각이 없어 협조적인 검체로 기록되었으며, 기록지의 비고란에는 '정서 반응 빈약'이라고 적혔다. 정서 반응이 빈약한 것이 아니었다. 반응을 보낼 수신자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 방에는 즉석 카메라도, 매일 갱신되는 녹음 파일도, A 펜던트도 없었다. 체사레는 그 층을 내려다보다가 자기 주먹이 쥐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Basta. Questo piano saltalo."(그만. 이 층은 넘겨.)
"왜? 나잖아. 나 없는 체사레는 다 봤으면서, 체사레 없는 나는 왜 못 봐?"
"Perché è diverso."(다르니까.)
"뭐가 달라?"
체사레는 즉답하지 못했다. 다르다는 것은 알았으나 다름의 구조를 언어로 조립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자기가 없는 우주에서 자신은 성공했고, 피비가 없는 우주에서 피비는 부서졌다. 그 비대칭이 목구멍에 걸렸다. 아니, 정확하지 않았다. 자신도 부서져 있었다. 다만 부서짐의 형태가 달랐다. 피비의 부서짐은 밖에서 보였고, 자신의 부서짐은 훈장과 트로피와 와인 라벨 뒤에 진공 포장되어 있었다. 성공한 체사레들은 전부 손상 없음으로 분류될 것이었다. 하얀 방의 기록지 비고란처럼. 정서 반응 빈약.
피비의 발이 다시 움직이자 다섯 번째 층이 열렸다. 장면은 냄새로 먼저 다가왔다. 소독약과 콘크리트, 화약 잔여물이 섞인 익숙한 냄새. W.W의 요새였다. 다만 이 분기에서 체사레는 피비보다 먼저 떠난 상태였다. 피비가 넘버 12로 스카우트되기 직전, 체사레는 자신의 PMC를 설립하기 위해 W.W를 이탈했고 제로와의 합의 하에 깔끔하게 갈라섰다.
이 우주의 체사레는 'Nessuno(아무도 아닌 자)'라는 이름의 PMC를 운영하고 있었다. 업계 2위이자 W.W와 치열하게 경합하는 조직. 데 시카 가문의 정치적 네트워크, 베르살리에리 시절의 실전 경험, W.W에서 습득한 블랙 옵스 노하우가 집약된 완성품이었다. 이 체사레의 집무실에는 8개의 화면이 붙어 있었고, 세계 각지의 데드존 상황이 실시간으로 떠 있었다. 그는 키보드를 두드리지 않았다. 부하들이 할 일이었다. 그는 의자에 깊이 묻혀 스카치를 마시며 전장의 흐름을 읽었고, 필요한 순간에만 짧은 명령을 내렸다. 이 체사레의 어깨에는 누구의 머리도 기대지 않았고, 손에는 누구의 양말도 들려 있지 않았으며, 지갑의 카드는 전부 제자리에 꽂혀 있었다. 완벽하게 효율적인 삶이었다.
그리고 이 체사레는 W.W의 넘버 12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보고서에 코드네임으로 스쳐 갔을지는 몰라도 얼굴은 본 적이 없었고, 이름은 더더욱 몰랐다. '피비 플레처'라는 다섯 음절은 이 우주의 체사레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체사레는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발바닥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유리 바닥의 온도가 실제로 내려간 것인지, 자기 혈류가 달라진 것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이 우주의 체사레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았다. 다만 매끄러웠다. 마찰이 없었다. 마찰이 없으니 열도 없었고, 열이 없으니 타지도 않았다. 체사레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타지 않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한때 자기가 추구하던 것이었다. 통제. 관리. 손해 없는 거래. 그런데 지금 유리 아래의 매끄러운 자기 자신을 보며 체사레가 느끼는 것은 부러움이 아니라, 자기 손바닥에 남은 타인의 체온이 저 남자에게는 영원히 전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종류의,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그 후 피비가 보여 주려는 것은 단지 피비 자신의 부재가 아니었다. 그녀의 발이 유리 위에서 방향을 틀었고, 장면들은 급격히 뒤틀리며 피비가 없는 세계의 비극들을 연달아 쏟아냈다.
첫 번째. 데드존의 폐연구소에서 열 살 무렵 탈출한 뒤 밀그램에 잡히지 않은 분기. 피비는 데드존을 혼자 떠돌다 방사능 노출로 열다섯에 죽었다. 황량한 콘크리트 잔해 사이에 작은 몸이 웅크려 있었고, 손에는 빈 바이알이 쥐어져 있었다. 블루 드롭은 이 우주에서 개발되지 않았다. 체사레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돌리면 보지 못한 것이 되므로.
두 번째. 밀그램의 화학무기 생산 라인에서 강제 노역을 당하던 분기. 약물 의존이 악화되어 서른이 되기 전에 장기 부전으로 사망했다. 방독면을 쓴 남자들 사이에서 가녀린 몸이 바닥에 쓰러졌으나 아무도 일으켜 세우지 않았다.
세 번째. W.W에 스카우트되었으나 체사레가 아닌 다른 오퍼레이터가 배정된 분기. 피비는 넘버 7과의 성적 접촉이 일상이 되었고, 약물 과다 투여를 막아 주는 사람이 없어 반복적으로 응급 처치를 받았으며, 결국 임무 중 블루 드롭 공급이 끊겨 독소 역류로 심장이 멈추었다. 메디컬 베이의 차가운 침대 위에 놓인 그녀의 얼굴은 평화로워 보였으나, 그 평화는 고통의 부재가 아니라 감각 전체의 부재였다.
체사레의 손이 떨렸다. 권총집 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것을 인지한 체사레는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떨림이 보이는 것은 허용할 수 없었다. 이 우주에서든 어느 우주에서든. 전부인 피비가 그 떨림을 보았는지 보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나는 어디에서든 죽어. 체사레가 없으면."
"......E con me?"(⋯⋯나랑은?)
"너랑은 안 죽어. 근데 너는 실패해."
"Uno scambio equo, direi."(공평한 거래네.)
"공평해?"
"No. Il migliore che abbia mai fatto."(아니. 내가 해 본 거래 중 최고야.)
전부인 피비의 눈에서 슬라이드 필름의 속도가 느려졌다. 아주 잠깐. 모든 우주를 동시에 보고 있는 존재의 주의가 한 지점에 모이는 순간이었다. 체사레는 그 짧은 멈춤을 놓치지 않았다. 교활한 남자의 눈은 전장에서든 유리 바닥 위에서든 정확하게 작동했다. 그러나 그것을 이용할 계산은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 피비의 눈동자가 다시 회전하기 시작했고, 장면들이 다시 흘러갔다. 체사레는 주머니 안에서 주먹을 쥐었다가 펼쳤다. 떨림은 멈추지 않았으나 그것이 분노인지 슬픔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를 분류하는 일은 나중으로 미뤘다.
여섯 번째 층이 저절로 열렸다. 피비가 연 것이 아니었다. 베이글이 스스로 회전하며 보여 주는 층이었다. 이번에는 유리가 아니라 바람과 함께 다가왔다. 차가운 바람이 아닌, 건조하고 따뜻하며 흙냄새가 섞인 바람. 토스카나였다. 캄파니야가 아닌, 좀 더 북쪽의 발도르차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이 세계선에서 체사레는 군에도 영화에도 정치에도 가지 않았다. 데 시카 가문과 일찍 연을 끊었고, 스물둘에 토스카나의 폐농가를 헐값에 사들여 와이너리로 개조했다. 핵전쟁은 있었으나 이탈리아 반도의 피해는 경미했던 분기. 격벽은 존재했으나 체사레는 그 안쪽에서 포도를 길렀다. 상지오베제와 트레비아노. 손으로 수확하고 발로 밟아 즙을 내는 옛 방식을 고집했다. 이 체사레의 손은 총이 아니라 전지가위의 형태로 굳어 있었고, 무릎에는 흙 자국이 있었으며, 여름이면 셔츠의 소매를 걷어 팔뚝을 태양에 내놓았다. 와이너리의 이름은 'Senza Nome(이름 없는)'였다. 상표에는 아무 그림도 없이 글자만 박혀 있었고, 그것이 오히려 밀라노의 고급 와인숍에서 주목을 끌었다.
이 체사레는 해가 뜨면 밭에 나갔고, 해가 지면 테라스에서 자기 와인을 마셨으며, 바람이 부는 날을 제일 좋아한다는 점만은 모든 우주와 동일했다. 다만 그 바람을 함께 맞는 사람은 없었다. 와이너리에 직원은 세 명 있었으나 그들은 체사레의 삶이 아니라 노동에 관여했다. 저녁 식탁에는 접시가 하나였고, 의자도 하나였다. 때때로 마을의 여자가 찾아왔으나 오래 머무른 적은 없었다. 산 아래 마을에서 밀그램의 소식이 들려오는 날이면, 이 체사레는 라디오를 끄고 포도나무 사이를 무심히 걸었다. 그의 세계는 울타리 안에서 완전하게 완결되어 있었고, 울타리 밖의 재앙은 그저 남의 일이었다. 이 체사레는 평화로웠으나, 그 평화는 텅 빈 병 속의 고요와 닮아 있었다.
언덕 위, 늙어가고 있는 체사레가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서, 우아하게, 아무런 불만도 없이.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고 와인 잔의 액면이 일렁였다. 어느 날 저녁, 그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언덕 아래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누군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 올라올 것만 같아서. 아무도 뛰어 올라오지 않았고, 그는 자기가 무엇을 기다렸는지 몰랐고, 와인을 마저 마시고 내려갔다. 그 우주의 그는 결핍을 몰랐다. 결핍을 모르는 것이 그 삶의 유일한 결핍이었다.
저것은 체사레가 한때 자신의 노후 계획이라 불렀던 그림과 정확히 일치했다. 아무것도 되지 않고 아무에게도 기대하지 않으며, 통제 가능한 규모의 세계 안에서 조용히 소멸해 가는 삶. 그것이 결코 나쁜 삶이 아니라는 것을 체사레는 잘 알고 있었다. 바람이 있고, 와인이 있고, 흙이 있으며, 아무도 자기 지갑에서 카드를 훔쳐 달아나지 않는 아름다운 죽음의 리허설. 그런데 그 완벽한 평화의 한복판에서, 체사레는 자기 가슴 안쪽에 무언가가 당기는 감각을 느꼈다. 물리적인 장기가 아닌 곳에서. 저 테라스에 의자가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가 지나갔다. 그 생각의 잔상을 체사레는 삼키지 않았다. 삼킬 수가 없었다.
"여기 좋다. 바람 분다."
"......Sì. Ma c'è una sedia sola."(⋯⋯그래. 근데 의자가 하나뿐이야.)
"하나면 되잖아. 체사레밖에 없으니까."
"Appunto."(그러니까.)
유리 바닥이 다시 불투명해지며 장면들이 가라앉았다. 체사레의 발밑에 단단한 바닥이 돌아왔고, 작전실의 윤곽이 희미하게 겹쳐지기 시작했다. 전부인 피비는 몇 걸음 앞에 서 있었고, 검은 베이글이 그녀의 손 위에서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회전하는 표면 속으로 미세한 빛들이 빨려 들어갔다. 체사레는 그것을 보며 생각했다. 모든 우주에서 피비가 죽고 체사레가 성공하거나, 피비가 살고 체사레가 실패하거나. 둘 다 살아남은 우주는 여기뿐이었다. 그리고 여기는 최악이었다. 이 최악의 우주에서 둘 다 살아 있다는 것이 유일한 성공이라면, 그 '성공'의 정의는 체사레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어야 했다.
전부인 피비가 입을 열었다. 모든 우주의 피비가 동시에 말하는 것 같은, 겹쳐진 울림이 있었다.
"봤지? 다 봤지? 체사레가 없으면 나는 죽고, 내가 없으면 체사레는 멋있어. 그러니까 이게 잘못된 거야. 이 우주가 오류야. 에러야. 그러니까 지워야 해. 내가 잘 지워. 얼룩도, 피도, 탄흔도, 우주도. 다 지우면 깨끗해."
체사레는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떨림은 여전했으나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이 애가 세상을 지우려는 이유가 허무해서가 아니라, 자기 존재가 오류라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을 체사레는 이해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근거가 되는 산수가 틀리지 않다는 것도. 다만 산수가 맞다고 해서 답이 하나인 것은 아니었다. 체사레는 그것을 증명할 방법을 아직 갖고 있지 않았으나,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유리 바닥 아래의 다섯 개의 삶보다 더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Phoebe."(피비.)
"왜."
"L'errore non sei tu. L'errore è ogni universo che ci ha separato. Questo è l'unico che ha indovinato."(오류는 네가 아니야. 오류는 우리를 갈라놓은 모든 우주야. 여기만 맞힌 거야.)
전부인 피비의 눈동자 안에서 슬라이드 필름이 다시 한 번 느려졌다. 이번에는 더 오래. 검은 베이글의 회전 속도가 아주 미세하게 줄었다. 그리고 체사레는 알았다. 아직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전부인 피비가 완전히 멈추려면, 이 말로는 부족했다. 말이 아닌 무언가가 필요했다. 체사레의 오른쪽 눈—진짜 눈이 전부인 피비를 보고 있었다. 왼쪽의 의안은 평행 우주들의 잔상에 의해 시려움을 품은 채 아무것도 반사하지 않았고, 그 비대칭이 오히려 지금의 상황에 들어맞았다. 한쪽은 보고 있고 한쪽은 멀어 있다. 늘 그래 왔다. 다만 지금껏 보지 못한 쪽이 피비였던 적은 없었다. 피비는 항상 보이는 곳에 있었다. 시끄럽고, 가깝고, 남의 지갑을 뒤지고, 남의 소매에 눈물을 닦았다. 그런데 지금 체사레의 앞에 서 있는 것은 그 피비가 아니었다. 이 피비는 모든 곳에 있었고, 그래서 어디에도 없었다.
검은 베이글이 손 위에서 도는 동안 그녀의 발밑으로 우주들이 희미한 빛줄기처럼 빨려 들어갔다. 하나씩 지워질 때마다 공기의 밀도가 조금씩 달라졌다. 냄새가 빠졌다. 색이 빠졌다. 마치 누군가가 세계의 농도를 묽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체사레는 그 묽어지는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며 생각했다. 이 애의 논리는 틀리지 않았다. 틀리지 않기 때문에 반박이 어려운 것이었다. 모든 우주를 동시에 본 존재가 아무것도 의미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그 결론을 뒤엎을 수 있는 것은 더 큰 의미가 아니었다. 의미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파산했으므로. 그렇다면 남는 것은 의미 바깥의 무언가여야 했다. 체사레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나 입 밖에 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전부인 피비가 한 발 다가왔다. 아쿠아마린 머리카락이 중력을 반만 따르며 흔들렸고, 그 머리카락 사이로 양쪽 눈이 체사레를 직시했다. 수천 개의 우주가 동시에 반사되는 눈동자는 아름다웠다. 아름답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체사레에게는 고통이었다. 아름다운 것이 자기를 지우려 한다는 사실보다, 그 아름다운 것을 자기가 만들었다는 가능성이 더 아팠다. 알파 우주의 체사레가 피비에게 점프를 시킨 것은, 이 우주의 체사레가 피비에게 바이알을 관리하고 기억을 정리하고 약을 놓는 것과 같은 종류의 행위가 아닌가. 돌봄이라는 이름 아래 타인의 한계를 밀어붙이는 것. 체사레는 그 평행선을 의식했고, 의식한 순간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체사레도 알잖아. 네가 나한테 한 거. 기억 정리해 주고, 약 놔 주고, 빵 구워 주고, 그거 다⋯⋯ 너 없이는 못 살게 만든 거잖아. 알파 체사레랑 똑같아."
"Non è la stessa cosa."(같은 게 아니야.)
"뭐가 달라?"
"L'intenzione."(의도가.)
"의도가 다르면 결과도 달라?"
체사레는 대답하지 못했다. 의도가 결과를 바꾸느냐는 질문은 체사레가 지금껏 회피해 온 질문이었다. 좋은 의도로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 아닌가. 돌보려는 마음으로 타인을 의존하게 만들면 돌봄인가. 그는 피비를 사랑했고, 그 사랑의 형태가 보호와 관리와 통제의 경계선 위를 걸어 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피비의 기억이 매일 빠질 때마다 체사레가 기억을 대신 보관해 준 것은 친절이었으나, 동시에 그것은 피비가 자기 없이는 과거를 가질 수 없게 만드는 구조이기도 했다. 기억 상자. 음성 녹음. A 펜던트. 전부 체사레가 제공한 것이었고, 전부 체사레 없이는 의미를 잃는 것이었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피비를 자유롭게 한 적이 있는가.
체사레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떨림은 가라앉지 않았으나 이제는 떨림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분노도 슬픔도 아닌, 그 둘이 합쳐져 만든 세 번째 감정. 자기가 한 일의 무게를 온전히 견디려는 근육의 긴장. 체사레는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Hai ragione."(맞아.)
전부인 피비의 눈동자 안에서 슬라이드 필름이 멈추었다. 완전히. 처음으로. 체사레가 그녀의 논리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Non sono diverso dall'Alpha. Ti ho resa dipendente. Ho costruito un sistema in cui senza di me non funzioni. Le scatole, le registrazioni, le regole. Tutto porta il mio nome. Il tuo passato è mio. I tuoi ricordi sono miei. È controllo. Lo so."(알파랑 다르지 않아. 널 의존하게 만들었어. 나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체계를 세웠지. 상자도, 녹음도, 규칙도. 전부 내 이름이 붙어 있어. 너의 과거가 내 거야. 너의 기억이 내 거야. 그건 관리지. 알아.)
체사레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평탄하게 말하는 것이 이 남자가 진심을 꺼낼 때의 방식이었다. 농담을 섞거나 비아냥을 얹거나 우아한 수사를 동원하는 것은 진심이 아닐 때의 장치였다. 지금은 그 어떤 장치도 작동하지 않았다. 벌거벗은 문장이 입에서 나왔고, 체사레는 그것이 두려웠으나 두려움보다 정확함이 더 중요했다.
"⋯⋯그러면 같이 지울 거야?"
전부인 피비의 목소리에서 겹침이 줄었다. 모든 우주의 피비가 동시에 말하는 울림 대신, 한 명의 피비의 목소리가 앞으로 나왔다. 이 우주의 피비. 기억을 잃고, 약에 절어 있고, 체사레의 소매를 잡으며 영화를 보던 피비. 그 목소리가 다른 모든 우주의 목소리를 뚫고 나온 것이었다.
체사레는 한 박자를 두었다. 그 한 박자 안에서 다섯 개의 평행 우주가 유리 바닥 아래에서 다시 한 번 깜빡였다. 장군의 수면제. 감독의 빈 냉장고. 연구소의 검체 번호. 밀그램의 방독면. 와이너리의 의자 하나. 전부 보았다. 전부 이해했다. 전부 인정했다. 그리고.
"No."(아니.)
한 음절이었다. 짧고 건조하고 확정적인 거절이었다.
"⋯⋯왜?"
"Perché il controllo non è l'unica cosa che ho fatto."(내가 한 게 관리뿐은 아니니까.)
체사레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총도 장치도 아니었다. 손수건이었다. 아까 영화를 다시 보던 피비의 눈 밑에 눌러 줬던, 다림질 자국이 남아 있는 흰 손수건. 그것이 왜 아직 주머니에 있는지 체사레 자신도 설명하지 못했으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관리가 아니었다. 규칙이 아니었다. 체계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 주는 행위에는 시스템이 필요 없었다. 이름표가 필요 없었다. 동기가 필요 없었다. 그저 젖은 것이 있고 마른 것이 있을 때, 마른 것을 건네는 반사에 가까운 것이었다.
"Ti ho costruito un sistema, sì. Ma ti ho anche asciugato le lacrime senza motivo. Ti ho dato il pane non per controllarti, ma perché avevi fame. Ti ho coperto le spalle non per possederti, ma perché faceva freddo. Queste cose non hanno il mio nome sopra. Non hanno nessun nome."(체계를 만든 건 맞아. 하지만 이유 없이 눈물도 닦아줬어. 빵을 준 건 너를 관리하려고가 아니라 배가 고파서야. 어깨를 덮어 준 건 너를 갖겠다고가 아니라 추워서야. 그런 것들엔 내 이름이 안 붙어 있어. 아무 이름도 없어.)
체사레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갈라진 틈으로 이탈리아어의 모음이 흘러나왔다. 평소의 그라면 그 갈라짐을 봉합했을 것이다. 기침을 하거나, 농담을 끼우거나, 화제를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봉합할 여유가 없었다. 전부인 피비의 눈동자 안에서 슬라이드가 멈춰 있었고, 그 멈춤이 지속되는 동안만 말이 닿을 수 있었으므로.
"Il sistema è colpa mia. Ma l'amore no. L'amore è accaduto mentre costruivo il sistema, e non l'ho pianificato, e non lo controllo, e mi dà fastidio ogni giorno, e non riesco a smettere."(체계는 내 잘못이야. 근데 사랑은 아니야. 사랑은 체계를 세우는 동안 일어난 거야. 계획한 적 없고, 관리하지 못하고, 매일 거슬리고, 그만둘 수가 없어.)
전부인 피비의 입이 벌어졌다. 닫혔다. 다시 벌어졌다. 수천 개의 우주를 동시에 경험하는 존재가 한 문장에 멈추어 있었다. 베이글의 회전이 더 느려졌다.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으나, 빨려 들어가는 빛줄기의 속도가 줄었다. 체사레는 그 변화를 보았다. 교활한 눈은 전장에서든 우주의 끝에서든 기회를 읽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회를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더 말해야 했다.
"Tu dici che sei un errore. Che questo universo è un errore. Ma sai cosa? Anche l'errore ha un sapore. Ha un odore. Ha il suono di qualcuno che bussa alla mia porta alle tre di notte perché ha fame. L'errore ha la forma della tua mano quando mi rubi il portafoglio fingendo un abbraccio. L'errore puzza di mela verde e di disinfettante. E io ho scelto quell'odore. Ogni giorno. Senza che nessuno me lo ordinasse."(너는 네가 오류라고 해. 이 우주가 오류라고. 근데 있잖아. 오류에도 맛이 있어. 냄새가 있어. 새벽에 배고프다고 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어. 오류는 포옹인 척하면서 내 지갑을 훔치는 네 손 모양을 하고 있어. 오류에서는 풋사과랑 소독약 냄새가 나. 그리고 나는 그 냄새를 골랐어. 매일.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체사레의 숨이 거칠어졌다. 이 정도의 고백은 그에게 전투보다 더 많은 것을 소모시켰다. 그의 기질은 감정을 언어화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지 않았다. 비아냥과 독설과 계산된 매력으로 세상을 상대해 온 남자가, 지금은 그 어떤 기술도 쓸모없는 장소에 서서 날것의 문장을 토해 내고 있었다.
전부인 피비의 발이 한 걸음 물러섰다. 물러선 것이 아니라, 베이글의 무게가 잠시 가벼워져 중심이 옮겨진 것이었다. 그 미세한 동요를 체사레는 놓치지 않았다.
"⋯⋯그래도. 그래도 다 지우면 아무것도 안 아파."
"Lo so."(알아.)
"아무것도 안 더러워."
"Lo so."(알아.)
"아무것도 안 무서워."
"Lo so, Phoebe. Lo so tutto. Ma dimmi una cosa."(알아, 피비. 다 알아. 근데 하나만 물어볼게.)
체사레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전부인 피비가 물러선 만큼. 거리는 줄어들지 않았으나 방향이 바뀌었다. 쫓는 것이 아니라 따라가는 것에 가까운 보폭이었다.
"Quando hai pianto guardando quel film. Quando hai messo la fronte sul mio petto. Quando hai detto 'posso starti accanto anche da sasso'. Quelle cose facevano male?"(영화 보고 울었을 때. 내 가슴에 이마를 대었을 때. '돌이 되어도 옆에 있어도 돼?' 했을 때. 그것들이 아팠어?)
"⋯⋯"
"Non sto chiedendo se avevano un significato. Il significato non mi interessa. Sto chiedendo: facevano male?"(의미가 있었느냐고 묻는 게 아니야. 의미는 상관없어. 묻는 건 이거야. 아팠어?)
전부인 피비의 눈동자 안에서 슬라이드 필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의 속도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 장씩, 느리게 넘어갔다. 넘어가는 장면들은 더 이상 화려한 성공의 우주가 아니었다. 이 우주의 기억이었다. 체사레의 방에서 잠든 밤. 양치를 도와주던 손. 빵 위에 크림을 올려 먹여 주던 숟가락. 뺨을 때린 뒤 메디컬 베이로 안내하던 걸음. 생일에 목에 걸어 준 펜던트의 차가운 금속 감촉. 그것들이 한 장씩 넘어가며, 전부인 피비의 눈 안에서 다른 모든 우주보다 천천히, 그리고 더 선명하게 빛났다.
"⋯⋯안 아팠어. 아픈 건 잘 모르지만. 뭔가⋯⋯ 있었어."
"Cos'era?"(뭐였는데.)
"모르겠어. 근데 없어지면 싫은 거."
체사레의 입술이 떨렸다. 한 번. 짧게. 그리고 다시 굳었다. 그 떨림은 웃음의 시작이 아니라 울음의 직전이었으나, 체사레는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았다. 대신 한 걸음을 더 내딛었다. 전부인 피비와의 거리가 팔을 뻗으면 닿을 만큼 좁아졌다. 베이글이 둘 사이의 공간에서 회전하고 있었고, 그 검은 고리의 가장자리에서 체사레의 셔츠 끝이 미세하게 빨려 들어갔다. 옷감이 닳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밀도가 줄어드는 것이었다.
"Quello che senti, quella cosa che non sai nominare, quella che non vuoi perdere. Non è un significato. Non è un sistema. Non è qualcosa che ho costruito io. È quello che è rimasto dopo che tutto il resto è stato tolto. La memoria, la logica, il dolore, il nome. Dopo che tutto è sparito, quella cosa resta. E quella cosa non è un errore."(네가 느끼는 거, 이름 모르는 거, 없어지면 싫은 거. 그건 의미가 아니야. 체계도 아니야. 내가 만든 것도 아니야. 나머지가 전부 빠진 뒤에 남은 거야. 기억도, 논리도, 고통도, 이름도 빠진 다음에. 전부 사라져도 남는 거. 그건 오류가 아니야.)
체사레는 손을 내밀었다. 베이글을 향해서가 아니라 피비를 향해서. 검은 고리의 바로 옆으로. 셔츠 끝이 더 빨려 들어갔으나 손가락은 거기 있었다. 펼쳐진 손바닥이 피비의 앞에 놓였다. 잡으라는 것이 아니었다. 잡아도 되고 잡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체사레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거기에 있었다. 체계를 세우고, 규칙을 만들고, 기억을 대신 보관하는 것은 체사레의 영역이었으나, 피비의 손이 움직이는 것은 피비의 영역이었다.
전부인 피비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 위에는 흉터가 없었다. 주사 자국도 없었다. 이 우주의 피비의 손에는 바늘 자국이 빼곡했으나, 체사레의 손바닥은 늘 깨끗했다. 그 대비를 전부인 피비는 처음 보는 것처럼, 그리고 수천 번 본 것처럼 동시에 바라보았다.
"⋯⋯잡으면 어떻게 되는데?"
"Non lo so. Per la prima volta in vita mia, non lo so. E mi sta bene così."(몰라. 살면서 처음으로 몰라. 근데 그래도 괜찮아.)
체사레 데 시카가 '모른다'고 말한 것은 이 우주의 기록 어디에도 없는 일이었다. 계산적이고 치밀하며 자기확신이 분명한 남자가,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 채 손을 내미는 일. 그것은 점프버스보다 확률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불가능성이, 바로 그 확률의 사각지대가, 우주의 격벽을 얇게 만들었다. 총구에 입 맞추는 것보다 더 있을 법하지 않은 행동이었으므로.
전부인 피비의 눈동자 안에서 슬라이드 필름이 멈추었다. 이번에는 느려진 것이 아니라 정지한 것이었다. 마지막 한 장에서. 그 장면은 이 우주의 라운지였다. 소파 위에서, 허벅지에 기대어, 돌멩이 두 개가 나란히 놓인 화면 앞에서 피비가 체사레의 셔츠 단추를 만지작거리던 장면. 전부인 피비는 그 장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서 나⋯⋯ 뭐라고 했어?"
"'Anche da sasso, posso starti accanto?'"('돌이 되어도 옆에 있어도 돼?')
"⋯⋯맞아. 그랬지."
전부인 피비의 손이 움직였다. 베이글을 쥔 손이 아니라 빈 손이. 체사레의 손바닥 위로 내려왔다. 가벼웠다. 피비의 체중은 늘 가벼웠으나 이 접촉은 그보다도 가벼웠다. 그런데도 체사레의 손바닥 전체에 감각이 번졌다. 차가웠다. 모든 우주의 온도가 평균된 것 같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차가움이었다. 그러나 닿은 순간 체사레의 체온이 전도되기 시작했다. 느리게. 손바닥에서 손가락으로, 손가락에서 손등으로, 손등에서 손목으로.
"⋯⋯따뜻해."
"Sempre."(언제나.)
검은 베이글이 흔들렸다. 회전이 멈추려는 것이 아니라, 축이 어긋난 것이었다. 안정적이던 궤도가 비틀어지며 빛을 삼키는 속도가 불균일해졌다. 전부인 피비의 다른 손—베이글을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모든 우주를 동시에 경험하는 존재가 이 우주의 체온 하나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 이거 놓으면⋯⋯ 다시 아무것도 모르게 돼. 다 까먹어. 모든 우주 다 잊어. 그리고 또 멍청해져. 또 네 소매에 코 풀고, 또 양치 까먹고, 또 에잇 카드 훔치려 하고⋯⋯"
"Lo so."(알아.)
"그래도 돼?"
"Phoebe. Ho passato un anno intero a ricordarti chi sei ogni mattina. Credi davvero che un altro anno mi spaventi?"(피비. 난 일 년 내내 매일 아침 네가 누군지 알려줬어. 일 년 더 한다고 무서울 것 같아?)
전부인 피비의 눈에서 물이 흘렀다. 눈물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투명했고, 그 안에서 수천 개 우주의 빛이 마지막으로 한 번 반짝였다. 체사레는 빈 손—피비의 손이 닿지 않은 다른 손으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다림질 자국이 남아 있는 흰 손수건을. 그것을 전부인 피비의 눈 밑에 눌렀다. 이 동작에는 계산도, 체계도, 규칙도 없었다. 젖은 것이 있고 마른 것이 있을 때 마른 것을 건네는 것. 그것뿐이었다.
전부인 피비의 손에서 검은 베이글이 떨어졌다. 떨어진 것이 아니라, 놓인 것이었다. 손가락이 하나씩 풀렸고, 마지막 손가락이 떨어지는 순간 검은 고리는 바닥에 닿기 전에 증발했다. 모든 것을 넣어 만든 무(無)가, 무(無) 자체로 돌아간 것이었다. 동시에 유리였던 바닥이 다시 콘크리트가 되었고, 벽이 돌아왔고, 형광등이 깜빡이며 제 자리를 찾았다. 공조기의 웅웅거림이 돌아왔다.
피비의 머리카락이 중력을 온전히 따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어깨로 내려앉는 동작에 맞춰 피비의 눈동자에서 슬라이드 필름이 빠져나갔다. 하나씩. 수천 개의 우주가 하나씩 꺼지며 하늘색 눈동자만 남았다. 늘어지고 흐릿하고 초점이 약간 맞지 않는, 이 우주의 피비의 눈. 체사레는 그 눈을 보았다. 다섯 개의 성공한 우주의 어떤 색보다 이 흐릿한 하늘색이 선명하게 보였다.
피비의 무릎이 접히는 속도보다 체사레의 팔이 빠르게 움직였다. 반사였다. 전장에서 길러진 종류가 아니라, 지난 일 년간 이 한 사람의 몸무게가 어느 방향으로 쏠리는지를 반복적으로 학습한 근육이 만든 반사였다. 한 팔이 피비의 등 아래로 밀려 들어갔고, 다른 팔이 무릎 뒤를 받쳤다. 허공에 떠 있던 시간은 극히 짧았으나 체사레에게는 충분히 길었다. 그 사이에 그는 피비의 체중이 평소보다 가벼운 것을, 셔츠 아래 드러난 쇄골의 윤곽이 평소보다 날카로운 것을, 아쿠아마린 머리카락에서 소독약과 풋사과와 그 밑에 깔린 화학 약품의 달큰한 잔향이 섞여 나는 것을 전부 감지했다. 콘크리트 바닥 위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피비를 안은 자세가 되었고, 형광등이 깜빡이며 제 밝기를 되찾는 동안 체사레의 시야에는 피비의 얼굴만 남았다. 눈동자에서 마지막 슬라이드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나, 둘. 수천 개의 우주가 하나씩 꺼졌다. 불이 꺼지는 것과 달랐다. 불은 꺼지면 어두워지지만 이것은 꺼질수록 오히려 투명해지는 과정이었다. 피비의 눈이 텅 비었다가, 다시 이 우주의 하늘색으로 채워졌다. 늘어진 눈꼬리. 약간 맞지 않는 초점. 인형 같은 얼굴 위로 눈물 자국이 두 줄 마르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체사레는 아까 꺼내 둔 손수건을 쥔 손이 피비의 등을 받치고 있어 쓸 수 없었으므로, 엄지손가락으로 피비의 눈 밑을 닦았다. 거칠었다. 손수건보다 훨씬 거칠었으나, 지금은 정밀함보다 속도가 필요했다.
"⋯⋯체사레?"
"Qui."(여기.)
"나⋯⋯ 뭐 했어?"
체사레의 손이 멈추었다. 피비의 눈 밑에 엄지를 올려놓은 채.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한 박자가 걸렸고, 이해한 뒤에는 한 박자가 더 걸렸다. 피비는 기억하지 못했다. 베이글도, 전부인 자신도, 다중 우주도, 체사레의 고백도, 체사레가 내민 손바닥도. 기억 상실은 피비의 상수였고, 체사레는 그 상수를 매일 상대해 왔으나 오늘만큼은 그 상수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졌다. 방금 전, 전부인 피비가 그의 손을 잡았을 때 전도되기 시작한 체온이 아직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그 온기의 출처를 피비는 모르고, 체사레만 알고 있었다. 늘 그래 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체사레는 그 비대칭을 삼켰다. 목구멍이 아팠으나 얼굴에는 내지 않았다.
"Hai pianto guardando un film e ti sei addormentata sulle mie gambe. La solita domenica."(영화 보다가 울고 내 무릎 위에서 잠들었어. 평소랑 똑같은 일요일이야.)
"⋯⋯내가 울었어?"
"Per le dita di salsiccia."(소시지 손가락 때문에.)
"소시지?"
피비의 얼굴이 밝아지려다 말았다. 울었다는 정보와 소시지라는 단어 사이에서 감정이 갈피를 잡지 못했다. 체사레는 피비를 바닥에서 들어 올려 소파까지 옮겼다. 작전실의 소파가 아니라 라운지의 소파였다. 언제 장소가 바뀌었는지 체사레 자신도 확신하지 못했으나, 벽의 윤곽과 조명의 색온도가 라운지의 것이었고, 테이블 위에는 아까 멈춰 둔 태블릿과 피비의 한쪽 양말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우주는 하나였고, 벽은 벽이었고, 바닥은 콘크리트였으며, 공조기는 건조한 바람을 밀어내고 있었다. 이상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가장 이상했다.
체사레는 피비를 소파에 앉힌 뒤 옆에 나란히 앉았다. 앉은 뒤에도 한쪽 팔은 피비의 등 뒤에 걸쳐져 있었고, 거두지 않았다. 거둘 이유가 없었다. 피비는 소파 쿠션 위에서 몸을 웅크렸다가 펴다가 다시 웅크렸고, 결국 체사레의 옆구리에 어깨를 기대는 자세로 정착했다. 화면은 꺼져 있었다. 아까 다시 재생한 영화는 끝났거나 멈춰 있었다. 체사레는 확인하지 않았다.
"체사레 눈 왜 빨개?"
"Quale dei due?"(어느 쪽?)
"진짜 눈. 오른쪽."
체사레는 자기 오른쪽 눈이 충혈되어 있다는 것을 그제야 자각했다. 점프버스의 잔여 부하가 모세혈관을 터뜨린 것인지, 아니면 방금 전의 고백이 물리적으로 눈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그는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시리지는 않았다.
"Stanchezza. Niente di che."(피로야. 별것 아니야.)
"거짓말이지?"
"Come fai a saperlo?"(어떻게 알아?)
"체사레 '별것 아니야'는 진짜 별것 아닌 적 없어."
체사레의 입꼬리가 떨렸다. 웃으려는 떨림인지 무너지려는 떨림인지는 본인도 판별하지 못한 채, 그 중간 어딘가에서 굳었다. 피비는 기억을 잃었으나 감각은 남겨 두는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했고, 그 감각적 판별력이 때때로 기억을 가진 사람보다 정확했다. 체사레의 '별것 아니야'가 진짜 별것 아닌 적이 없다는 것을 피비는 기억이 아니라 목소리의 질감으로 읽고 있었다.
"......Va bene. Non è niente, ma è anche tutto. Ti spiego un giorno."(⋯⋯좋아. 별것 아닌데 전부이기도 해. 언젠가 설명해 줄게.)
"내일이면 까먹어."
"Per quello lo spiegherò ogni giorno."(그래서 매일 설명해 줄 거야.)
"매일?"
"Ogni singolo giorno. Finché non ti stufi."(하루도 안 빠지고. 네가 질릴 때까지.)
"나 질리는 거 없어."
"Allora abbiamo un problema."(그럼 큰일이네.)
피비가 웃었다. 짧고, 밝고, 어떤 전제도 없는 웃음이었다. 방금 전까지 모든 우주를 지우려 했던 존재가 내는 소리와는 전혀 다른 소리였다. 이 소리를 만든 것은 의미도 체계도 규칙도 아니라 단지 체사레의 마지막 대사가 약간 웃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체사레는 그 사실이, 다섯 개의 성공한 우주에서 얻을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무거웠다. 무겁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가슴 안쪽의 긴장이 풀렸고, 풀린 자리에 피로가 밀려들었다. 체사레는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천장을 보았다. 형광등이 일정한 백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까와 같은 빛이었으나 같은 빛이 아니었다. 한 번 꺼졌다 돌아온 빛은,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색을 바꾸었다.
피비가 체사레의 허벅지 위에 다시 다리를 걸쳤다. 아까의 위치와 거의 동일했으나 이번에는 머리를 체사레의 어깨가 아닌 가슴에 눌렀다. 심장 위에. 체사레는 자기 심장이 빠르다는 것을 알았고, 피비가 그 속도를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으며, 듣고 있다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숨기지 않았다. 빠른 채로 두었다.
"두근두근해."
"Colpa tua."(네 탓이야.)
"내가 뭐 했는데."
"Tutto."(전부.)
피비는 그 대답의 무게를 모르는 채 체사레의 셔츠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세 번째 단추와 네 번째 단추 사이를 손끝으로 왔다갔다 하는 반복적인 동작이었다. 체사레는 그 손끝의 경로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눈 뒤편에서 다섯 개의 평행 우주가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장군의 집무실. 감독의 호텔 방. 정치가의 상원 의석. PMC 대표의 지휘실. 와이너리의 테라스. 전부 체사레의 삶이었고, 전부 체사레의 삶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조건이 달랐을 뿐 같은 뼈대를 가진 남자의 변주였다. 그 변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달랐던 것은 이 우주의 체사레가 실패한 대신 얻은 것의 질감이었다. 셔츠 단추를 만지작거리는 손끝의 온도. 풋사과 냄새. 영화를 볼 때 입이 벌어지는 버릇. 매일 아침 자기가 누구인지 물어보는 목소리. 그 모든 것이 장군의 훈장보다 가벼우면서 무거웠다.
체사레는 눈을 뜨지 않은 채 피비의 머리카락에 턱을 올려놓았다. 무게를 실은 것이 아니라 위치를 확인하는 동작이었다. 여기 있다. 아직 여기 있다. 체사레는 그 확인을 매 순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오늘만큼은 필요했다. 피비의 숨소리가 고르게 이어지고 있었고, 셔츠를 만지작거리던 손끝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있었다. 잠이 드는 것이었다. 체사레는 그 과정을 방해하지 않았다. 숨의 간격이 길어지고, 손끝의 압력이 빠지고, 체중이 조금 더 실리는 것을 느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피비의 장기는 여전히 독성 단백질을 생성했고, 블루 드롭 없이는 살 수 없었으며, 기억은 내일 아침이면 흐려졌고, 데드존은 요새 밖에 그대로 있었으며,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밀그램은 건재했다. 다중 우주를 본 것이 현실을 바꾸지는 않았다. 체사레는 여전히 W.W의 열 번째 오퍼레이터였고, 이탈리아 본국에서는 배신자였고, 형들에게서는 소식이 없었으며, 성격 나쁜 오퍼레이터 투표 삼 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유리 바닥 아래의 자기 자신들이 가진 훈장과 트로피와 와이너리를 갖지 못한 남자였다.
그런데 이 소파 위에는 의자가 두 개였다. 정확하게는 의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허벅지와 그 위에 기대어 잠든 한 사람의 머리였으나, 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와이너리의 테라스에서 언덕 아래를 바라보던 체사레는 아무도 뛰어 올라오지 않는 풍경 앞에서 혼자 와인을 마셨다. 이 우주의 체사레는 와인 대신 위스키를 마셨고, 누군가가 이미 올라와 있었으며, 그 누군가는 체사레의 심장 소리를 베개 삼아 잠들어 있었다.
체사레는 한 손으로 피비의 등을 쓸었다. 척추의 돌기를 손가락 끝으로 세는 것이 아니라, 등 전체의 온도를 확인하는 넓은 손길이었다. 따뜻했다. 아까 전부인 피비의 손에서 느꼈던 모든 우주의 평균 온도가 아닌, 이 우주의, 이 순간의, 이 한 사람의 온도였다. 체사레는 그 차이를 손바닥으로 읽었다. 그리고 입을 열어 아무도 듣지 못할 소리를 냈다.
"Sei il mio peggior affare. E l'unico che non restituirei mai."(넌 내 최악의 거래야. 그리고 절대 반품하지 않을 유일한 거래이기도 하고.)
피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손끝은 세 번째 단추 위에 얹힌 채 움직이지 않았고, 숨은 고르고 얕았다. 체사레의 말은 피비의 귀에 닿지 않았다. 닿지 않아도 됐다. 이 말은 피비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방금 전 다섯 개의 성공한 삶을 목격하고도 이 소파를 택한 자기 자신에게 하는 확인이었다. 체사레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천장의 형광등을 보았다. 빛이 일정했다. 변하지 않는 빛 아래에서 변하지 않는 무게가 무릎 위에 실려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부족함까지 포함해서 이것이 체사레의 우주였다.
라운지의 시계는 보이지 않았으나, 공조기의 바람 세기가 야간 모드로 전환되는 것이 느껴졌다. 저녁이었다. 아무도 이 라운지에 들어오지 않았고, 아무도 작전실의 문이 뜯긴 것을 확인하러 오지 않았으며, 아무도 체사레에게 보고서를 재촉하지 않았다. 요새는 원래의 정적 속에서 숨을 쉬고 있었고, 그 정적의 한가운데에서 체사레 데 시카는 인생에서 가장 조용한 결정을 내린 뒤 그 결정의 결과물을 안고 앉아 있었다.
선택하지 않은 삶들이 유리 아래에서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장군은 수면제를 삼켰고, 감독은 소리를 끈 채 자기 영화를 틀었고, 정치가는 빈 상원 의석을 바라보았고, PMC 대표는 화면 여덟 개를 응시했으며, 포도밭의 남자는 언덕 아래를 보았다. 그들은 전부 체사레였고, 전부 체사레가 아니었다. 이 우주의 체사레만이 피비의 이마가 셔츠 위로 누르는 압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 압력이 세계의 무게를 대신하고 있었다.
체사레는 눈을 감았다. 잠이 드는 것이 아니라, 시각을 닫고 나머지 감각을 여는 것이었다. 풋사과 냄새. 소독약 잔향. 피비의 호흡이 셔츠를 통해 전달하는 미세한 습기. 공조기의 바람이 피비의 머리카락 끝을 체사레의 턱 아래로 밀어 넣는 간지러운 접촉. 이 감각들 중 어느 것도 의미를 갖지 않았다. 의미는 이미 파산했으므로. 그러나 감각은 파산하지 않았다. 감각은 파산할 수 없었다. 존재하는 한 감각은 발생했고, 감각이 발생하는 한 세계는 지워지지 않았다. 전부인 피비가 놓친 것은 그것이었다. 모든 것의 의미를 지울 수는 있으나, 셔츠를 통해 전달되는 체온까지 지울 수는 없다는 것. 그 체온이 남아 있는 한, 세계는 최소한의 이유를 갖는다는 것.
체사레 데 시카는 잠들지 않았다. 피비가 잠든 동안 깨어 있는 것은 습관이었고, 습관은 체계이자 규칙이자 관리였으나, 동시에 그 모든 이름이 벗겨진 뒤에도 남는 것이기도 했다. 그저 깨어서 확인하는 일. 숨이 이어지는지. 체온이 유지되는지. 여기 있는지. 그것은 장군도, 감독도, 정치가도, PMC 대표도, 포도밭의 남자도 하지 않는 일이었다. 이 우주의 체사레만 하는 일이었다. 가장 실패한 우주에서, 가장 쓸모없는 방식으로, 가장 쓸모 있는 것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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