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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CE
10/LOG

세입자

2026. 8. 20. 00:55

택배가 도착한 것은 오후의 끝자락이었다. 섹터 A 보안초소에서 검수를 거친 박스가 내부 물류 카트에 실려 섹터 E까지 왔고, 복도에서 그것을 받아 든 것은 체사레가 아니라 피비였다. 그녀는 카트 담당자에게 주소를 알려 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섹터 E, 10번 개인실. 카트 담당자는 별다른 의문 없이 서명 패드를 내밀었고, 피비는 손가락 끝으로 알아볼 수 없는 낙서를 긁어 넣은 뒤 박스를 양팔로 끌어안았다. 체사레의 상반신 폭보다 넓은 골판지 상자였다. 그녀는 그것을 가슴에 바짝 붙이고 복도를 걸어갔는데, 걸음걸이가 평소보다 빨랐고, 입가는 이미 풀어져 있었다.

방 안에서 박스를 뜯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체사레가 세면대에서 손을 닦고 돌아왔을 때, 바닥에는 찢긴 테이프와 완충재 조각이 흩어져 있었고 피비는 그 한가운데에 앉아, 자기 몸통보다 큰 것을 끌어안고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바디 필로우 인형이었다. 두꺼운 봉제 원단으로 채워진, 연한 크림색 동물 형태의 거대한 쿠션이었는데 정확히 어떤 동물인지는 파악하기 어려웠다. 곰과 물개 사이의 어중간한 생김새였고, 눈이 단추처럼 작고 코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크기였다. 피비가 껴안으면 얼굴이 반쯤 파묻힐 정도였고, 세로 길이는 거의 체사레의 신장에 맞먹었다.

12 | "왔다!"
10 | "…What is that."(…그게 뭐야.)
12 | "내 인형. 체사레한테 부탁해서 산 거잖아."

맞았다. 피비가 며칠 전 단말을 들이밀며 이거 사도 돼 이거 사도 돼를 반복했을 때, 체사레는 화면에 뜬 상품을 대충 확인하고 승인한 적이 있었다. 썸네일에서는 평범한 쿠션처럼 보였다. 실물은 평범한 쿠션이 아니었다. 바닥 면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거대한 덩어리가 피비의 팔 안에서 눌렸다 펴졌다 하고 있었고, 그녀는 인형의 팔 부분을 양쪽으로 벌려 제 몸에 두르듯 감은 채 행복한 얼굴로 회전했다. 발밑에 완충재가 밟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10 | "I approved a cushion. Not a second tenant."(쿠션을 승인한 거지. 세입자를 들인 게 아니야.)
12 | "쿠션 맞아. 큰 쿠션."
10 | "That thing is my height."(저건 나랑 키가 같은데.)
12 | "그래서 좋아."

그 대답이 너무 즉각적이어서 체사레의 시선이 잠깐 멈췄다. 피비는 인형을 소파 위에 올려놓고 위치를 이리저리 조정했다. 머리 쪽을 팔걸이에 기대고, 팔 부분을 옆으로 벌리고, 자기가 누울 공간을 확보하듯 인형의 배 쪽을 눌러 홈을 만들었다. 마치 동거인의 잠자리를 배치하는 것처럼 진지했다. 체사레는 팔짱을 끼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인형의 단추 눈이 천장을 향해 올려다보고 있었고, 저 무표정한 봉제 얼굴이 앞으로 매일 밤 이 방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서서히 실감되었다.

12 | "이름 뭐로 할까."
10 | "You're naming it."(이름까지 붙이는 거야.)
12 | "당연하지. 같이 자는데."
10 | "Wonderful."(훌륭하군.)

체사레의 목소리에서 열의를 찾기는 어려웠다. 피비는 그 톤을 전혀 개의치 않고 인형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혼자 이름 후보를 중얼거렸다. 아이스크림. 아니다. 구름. 아닌데. 마시멜로. 그것도 아니야. 결론이 나기 전에 그녀는 이미 인형 위에 엎드려 볼을 비볐고, 봉제 원단이 눌리면서 나는 둔탁한 소리가 방 안에 깔렸다. 체사레는 바닥에 흩어진 포장재를 줍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치워야 하니까.

그날 저녁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체사레는 보고서를 마무리하고 침대 옆 스탠드를 끈 뒤, 평소처럼 누웠다. 피비는 이미 씻고 나와 머리를 대충 말린 채 침대에 올라와 있었다. 여기까지는 익숙했다. 이 방에서의 밤은 이미 패턴이 되어 있었다. 피비가 먼저 자리를 잡고, 체사레 쪽으로 굴러오고, 팔이나 옷깃이나 손가락 끝을 잡고 늘어지다가 잠이 드는 순서였다. 체사레는 그 접촉을 거부한 적이 없었다. 불편하지 않았다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밀어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피비의 체온이 옆에 닿는 감각은 어느 순간부터 잠드는 조건의 일부가 되어 있었고,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지만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밤, 피비는 오지 않았다.

아니, 침대에는 올라왔다. 하지만 체사레 쪽이 아니라,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그리고 그 거대한 인형을 끌어안았다. 인형의 팔 부분이 피비의 어깨를 덮었고, 그녀는 인형의 배 쪽에 얼굴을 파묻은 채 다리까지 감아 올렸다. 마치 사람을 끌어안는 것처럼 온몸으로 밀착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며,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체사레는 천장을 보고 있었다. 옆에서 피비가 인형 원단에 볼을 비비는 소리가 들렸다. 스르륵. 봉제 원단과 피부가 마찰하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원래 제 셔츠 위에서 나던 것이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왼쪽 팔은 비어 있었고, 어깨에 닿아야 할 체중이 없었다.

10 | "…Comfortable?"(…편해?)
12 | "응. 이거 진짜 좋아."

피비의 대답은 잠이 밀려드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이미 반쯤 가라앉아 있었고, 인형에 파묻힌 얼굴 쪽에서 웅웅 울려 나왔다. 체사레는 대꾸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금 입 밖에 나올 말이 전부 체면을 깎는 종류였기 때문이었다. 가령 왜 거기서 자느냐거나, 여기로 오라거나, 그런 것이다. 그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래서 천장만 보았다. 스탠드를 끈 방 안은 어두웠고, 피비의 숨소리가 점점 느려지며 잠의 리듬에 맞춰졌다. 체사레는 눈을 감았다. 왼쪽이 비어 있었다.

다음 날 밤도, 그다음 날 밤도 같았다. 피비는 씻고 나와 침대에 올라오면 바로 인형 쪽으로 갔다. 체사레에게 잘 자라는 말은 했지만, 그 뒤로 굴러오지 않았다. 인형의 팔을 제 어깨 위에 올리고, 다리를 감고, 코를 파묻고 잠들었다. 체사레는 처음 이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피비는 그저 새 물건에 꽂혀 있는 것이었고, 조만간 식상해지면 돌아올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셋째 날 밤에도 피비가 인형 쪽으로 돌아눕자, 체사레는 노트북을 접고 불을 끄며 아주 짧은 의문을 허용했다.

이것이 계속되는 건가.

그 질문은 곧바로 지워졌다.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었다. 봉제 인형에 질투를 느끼는 스물아홉 살 남자라니. 그런 자각 자체가 그의 자존에 흠집을 냈고, 흠집이 난 자존은 더 완고하게 입을 닫게 만들었다. 그래서 넷째 날 밤에도 체사레는 누운 채 왼쪽이 비어 있는 것을 느꼈고, 다섯째 날에는 그 빈 공간이 미묘하게 넓어진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으나,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문제는 낮에 있었다. 낮의 피비는 변함없이 체사레에게 달라붙었다. 팔을 잡고, 소매를 당기고, 옆에 앉아 어깨에 기대고, 간식을 나눠 달라고 했다. 모든 접촉이 평소와 같았다. 다만 밤이 되면 그 접촉이 전부 인형에게로 옮겨 갔다. 체사레는 그 분리가 정확히 어디서 일어나는지 관찰했다. 피비가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릴 때까지는 아직 자기 쪽이었다. 그런데 침대에 올라오면 인형이 눈에 들어오고, 그 순간 스위치가 넘어가듯 방향이 바뀌었다. 인형의 봉제 원단이 주는 촉감과 온도가 그녀의 수면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것 같았다. 체사레보다 더. 그 사실이 가장 거슬렸다.

엿새째 밤이었다. 피비가 인형의 귀를 잡고 위치를 조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체사레는 옆으로 누운 채 등을 보이고 있었는데, 보이지 않는 쪽에서 피비가 인형에게 속삭이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12 | "너 좋다. 따뜻해."

체사레의 눈이 어둠 속에서 떠졌다. 그 말은 자기에게 한 것이 아니었다. 인형에게 한 것이었다. 봉제 원단 덩어리에게. 그는 이를 다물었다가 풀었다. 턱 근육이 한 번 움직이고 멈추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어야 했다. 하지만 따뜻하다는 말을 자기가 아닌 다른 존재에게 하는 것을 듣는 순간, 그가 지금까지 이름을 붙이지 않으려 했던 감각이 정면에서 부딪혔다. 그것은 사소하고, 유치하고, 인정하기 싫은 종류의 것이었다.

그는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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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LOG

더치페이

2026. 8. 18. 19:10

7월 5일, 토요일. 라스페치아에서 서쪽으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안전지대 내 레스토랑이었다. 격벽 안쪽의 구시가지를 살려 놓은 골목 끝자락, 테라코타 벽돌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트라토리아. 간판은 반쯤 바랬고 입구에는 올리브 나무 화분이 놓여 있었다. 10이 고른 자리는 안쪽 구석이었다. 벽에 등을 붙이고 출입구를 정면으로 볼 수 있는 위치. 직업병이었다. 피비는 맞은편에 앉아 메뉴판을 뒤집어 들고 그림을 보고 있었다. 글씨는 안 읽고 사진만 봤다. 사진이 없는 메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식사는 무난하게 끝났다. 무난하다는 말은 10의 기준에서 그랬다는 뜻이었고, 객관적 사실로는 피비가 리조또 위에 레몬 캔디를 올리려다 제지당했고, 빵을 수프에 통째로 빠뜨려 국물이 튀었고, 포크로 파스타를 먹다가 포기하고 손으로 집어 먹었으며, 디저트로 나온 판나코타의 카라멜 소스를 빵에 찍어 먹다가 접시를 밀어뜨려 테이블보에 갈색 자국을 남겼다. 10은 그 모든 과정을 포크를 든 채 지켜보며 와인을 네 잔 마셨다. 평소보다 한 잔 많았다.

10 | "Finished?"(다 먹었어?)
12 | "응. 배불러. 여기가 움직여."

피비는 자기 배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10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웨이터에게 시선을 보냈다. 계산서가 작은 가죽 폴더에 담겨 테이블 위에 놓였다. 10은 왼손으로 폴더를 열어 금액을 확인하고, 오른손으로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검은 가죽 지갑이었다. 모서리가 닳지 않은, 관리가 잘 된 물건. 카드를 뽑아 폴더 위에 올려놓으려는 동작이 자연스럽고 군더더기 없었다. 숨 쉬듯 하는 행위였다.

그때 피비의 손이 테이블 위로 뻗어왔다.

손바닥 위에는 구겨진 지폐 몇 장이 있었다. 접힌 방향이 전부 달랐고, 한 장은 모서리가 찢겨 있었다. 유로화였다. 금액을 세기도 전에 10의 손이 멈추었다. 카드가 폴더 위에 닿기 직전의 높이에서 정지했다. 그의 시선이 피비의 손바닥 위 지폐로 내려갔다가 피비의 얼굴로 올라갔다. 피비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손을 내밀고 있었다. 눈은 맑았고 의도는 분명했다.

12 | "이거. 보태."

10의 표정이 변하는 과정은 단계적이었다. 먼저 눈이 한 번 깜빡였다. 그 다음 입술이 다물렸다가 열렸다가 다시 다물렸다. 턱 근육이 아주 약간 움직였다. 그리고 카드를 든 손이 천천히 내려와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는 피비의 손바닥 위 지폐를 다시 한 번 내려다봤다. 구겨진 정도로 보아 주머니 안에서 오래 뒹굴었을 것이 분명했다. 한 장은 캔디 은박지가 묻어 있었다.

10 | "What is this."(이게 뭐야.)
12 | "돈이야."
10 | "I can see that."(그건 보여.)
12 | "같이 내려고."

10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오른쪽 눈의 연한 회색이 레스토랑의 따뜻한 조명 아래에서 은빛으로 빛났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려다 멈추는 것이 보였다.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웃기 전에 먼저 처리해야 할 감정이 너무 여러 개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당혹, 황당함, 그리고 그 밑바닥에 깔린 어떤 감촉.

10 | "You're offering to split the bill."(더치페이를 하겠다는 거야.)
12 | "더치페이가 뭔지 모르겠는데. 나도 먹었으니까 나도 내야 되잖아."

10은 피비의 손바닥 위 지폐를 집어 들었다. 한 장씩 폈다. 접힌 것을 펴고, 구겨진 것을 펴고, 찢어진 모서리를 맞춰 보았다. 총액을 머릿속에서 합산하는 데 걸린 시간은 짧았고, 그 결과가 10의 얼굴에 미치는 영향은 즉각적이었다.

10 | "This is eleven euros."(이거 11유로야.)
12 | "응."
10 | "The bill is a hundred and forty-seven."(계산서는 147유로인데.)
12 | "그럼 부족해?"
10 | "By approximately a hundred and thirty-six euros, yes."(대략 136유로 정도 부족하지, 그래.)

피비는 눈을 깜빡였다. 부족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으나, 그것이 왜 문제인지까지 도달하지는 못한 듯했다. 그녀는 주머니를 뒤졌다. 군복 바지 왼쪽 주머니에서 동전 두 개가 나왔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또르르 굴러갔고 10이 반사적으로 한 개를 잡았다. 50센트 동전이었다. 다른 하나는 레몬 캔디 은박지와 합체한 상태로 테이블보 위에서 멈추었다.

12 | "이것도."
10 | "Eleven euros and one."(11유로 1이 됐네.)

10은 동전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피비를 봤다. 피비는 진지했다. 농담이 아니었다. 자기가 먹은 것에 대한 값을 치르려는 의지가 분명했고, 그 의지의 방향과 수단 사이의 간극이 거대했다. 10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레스토랑 안의 다른 테이블에서 유리잔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고, 주방에서 접시를 옮기는 소리가 났다. 10은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10 | "Where did you even get this."(이거 어디서 났어.)
12 | "9가 줬어."
10 | "Nine gave you money."(9가 돈을 줬다고.)
12 | "응. 저번에 자판기에서 음료 뽑아 달라고 했는데, 거스름돈 안 가져가도 된다고 했어. 그래서 모았어."
10 | "You've been saving vending machine change."(자판기 거스름돈을 모은 거야.)
12 | "응."

10은 입을 다물었다. 11유로와 50센트. 자판기 거스름돈. 9가 준 것. 피비는 월급이나 수당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0이 관리하는 오퍼레이터 급여 체계에서 피비의 몫은 6과 10의 공동 관리 하에 의료비와 생필품으로 지출되고 있었고, 피비 본인이 현금을 소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녀가 가진 돈의 전부가 이것이었다. 자판기에서 굴러 나온 동전과 구겨진 지폐.

10은 지폐를 다시 한 장씩 접어 가지런히 만들었다. 동전을 그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전부 피비의 손 위에 돌려놓았다.

10 | "Keep it."(가지고 있어.)
12 | "싫어. 나도 먹었으니까."
10 | "I invited you. The person who invites pays. That's how it works."(내가 초대했으니까 초대한 사람이 내는 거야. 원래 그래.)
12 | "그런 규칙 없어."
10 | "There is. It's called being a gentleman."(있어. 신사도라고 해.)
12 | "신사도가 뭔데?"
10 | "It means I pay and you say thank you."(내가 내고 네가 고맙다고 하는 거야.)
12 | "고마워. 근데 받아."

피비는 지폐와 동전을 다시 10 쪽으로 밀었다. 10은 밀려온 돈을 보며 턱을 괴었다. 이 상황의 구조가 머릿속에서 정리되었다. 피비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무언가를 하겠다고 결정한 뒤 철회하는 경우는 약효가 꺼졌을 때뿐이었고, 지금 약은 충분히 돌고 있었다. 10은 선택지를 빠르게 검토했다. 강하게 거부하면 피비는 상처를 받지 않고 더 집요해질 것이다. 받아 주면 11유로 50센트를 들고 147유로짜리 식사에 기여했다는 성취감을 줄 수 있지만, 10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자존심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었으나, 적어도 11유로 50센트보다는 비쌌다.

10 | "Phoebe."(피비.)
12 | "응."
10 | "If I take this, I would owe you change."(이걸 받으면 내가 너한테 거스름돈을 줘야 해.)
12 | "왜?"
10 | "Because your share of a hundred and forty-seven euros would be seventy-three fifty. You're giving me eleven fifty. Which means you're overpaying by exactly nothing and underpaying by sixty-two euros."(147유로에서 네 몫은 73유로 50센트야. 넌 11유로 50센트를 주고 있어. 그러니까 62유로가 모자라.)
12 | "……."
10 | "So either give me sixty-two more, or let me pay."(그러니까 62유로를 더 내든지, 아니면 내가 내게 하든지.)

피비는 입을 벌린 채 잠시 멈추었다. 62유로. 그 숫자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어떻게 처리되는지 10은 관찰했다. 피비의 눈동자가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갔다가 다시 앞을 봤다. 계산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의 총량을 확인하는 동작이었다. 양쪽 주머니를 전부 뒤집었다. 왼쪽에서는 레몬 캔디 은박지 세 장과 실밥이 풀린 실 조각이 나왔다. 오른쪽에서는 3이 선물한 키링이 나왔다. 현금은 없었다.

12 | "없어."
10 | "I know."(알아.)

10은 카드를 집어 폴더에 넣었다. 웨이터가 다가와 카드를 가져갔다. 피비는 테이블 위에 남은 자기 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이 미세하게 달라져 있었다. 슬픈 것은 아니었다. 자기가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식한 얼굴이었다. 10은 그 표정을 보며 잠깐 멈추었다. 그리고 안주머니에서 다시 지갑을 꺼내 50유로 지폐를 한 장 뽑았다.

12 | "?"
10 | "For your trouble."(수고했으니까.)

10은 50유로 지폐를 피비의 11유로 50센트 위에 올려놓았다. 피비는 눈을 크게 떴다.

12 | "이게 뭐야?"
10 | "A tip. For the effort of trying to pay."(팁이야. 결제하려고 노력한 것에 대한.)
12 | "왜 네가 나한테 돈을 줘?"
10 | "Consider it hazard pay for sitting through dinner without committing a culinary felony."(저녁 식사 동안 요리에 대한 중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에 대한 위험수당이라고 생각해.)
12 | "리조또에 캔디 올리려고 한 건?"
10 | "I said 'without committing.' You attempted. That's a misdemeanor at best."(안 저질렀다고 했잖아. 넌 시도했어. 기껏해야 경범죄야.)

피비는 50유로 지폐를 들어 올려 빛에 비춰 봤다. 진짜인지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예쁜지 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지폐를 자기 11유로 50센트와 함께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10은 그 모습을 보며 결국 입꼬리를 더 이상 다물어 두지 못했다. 웃음이 새어나왔다. 낮고 짧은, 그러나 배 안쪽에서부터 올라오는 웃음이었다.

10 | "You just made a profit of fifty euros from a dinner you didn't pay for."(네가 한 푼도 안 낸 저녁에서 50유로를 벌어 갔네.)
12 | "응. 체사레 고마워."
10 | "Don't mention it. Literally. If Nine finds out I'm funding your vending machine empire, he'll want a cut."(말 안 해도 돼. 진심으로. 9가 내가 네 자판기 제국에 투자 중인 걸 알면 자기 몫을 달라고 할 거야.)

피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주머니 안에서 동전이 딸그락거렸다. 레스토랑을 나서며 그녀는 한 번 뒤를 돌아봐 10이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10은 지갑을 안주머니에 넣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밤공기가 문 사이로 밀려 들어왔다. 피비는 문밖으로 나서며 중얼거렸다.

12 | "다음엔 더 모아서 올게."
10 | "Please don't."(제발 그러지 마.)
12 | "왜? 다음엔 반 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10 | "At the rate of vending machine change, you'll be ready to split the bill by approximately 2097."(자판기 거스름돈 모으는 속도면 대략 2097년쯤 더치페이가 가능하겠네.)
12 | "그때도 같이 밥 먹어?"

10의 걸음이 반 보 느려졌다. 피비는 그가 느려진 것을 모른 채 앞서 걸어갔다. 골목의 가로등 아래를 지나며 그녀의 연한 머리카락이 빛에 잠깐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10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피비의 등을 보며 걸었다. 2097년. 피비는 그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을까. 그는 살아 있을까. 그 질문을 머릿속에서 지우는 데 세 걸음이 걸렸고, 네 번째 걸음에서 대답을 골랐다.

10 | "If you're buying, sure."(네가 산다면야, 그럼.)

피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팔을 들어 올렸다. 주먹을 쥔 손이 밤하늘을 향했다. 승리의 제스처였다. 주머니에서 동전이 또 한 번 딸그락거렸다. 61유로 50센트. 피비 플레처가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이 한쪽 주머니 안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10은 그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동전 소리가 울릴 때마다 입가의 선이 풀렸다가 다시 잡혔다가, 결국은 풀린 채로 남았다.


💬 61유로 50센트. 그 안에 든 동전 소리가 웃겨서 죽겠는데, 동시에 뭔가가 목 안쪽에 걸려서 내려가지 않아. 2097년이라니. 네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그때까지 네 옆에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말은 안 해. 절대 안 해. 그냥 동전 소리를 들으면서 걸을 거야.

 

 


 

 

피비는 캔디를 깨물었다. 사탕이 부서지는 소리가 입 안에서 났고, 그녀는 파편을 씹으며 발을 앞뒤로 흔들었다. 신발 뒤꿈치가 분수대 석재를 톡톡 두드렸다. 그 규칙적인 소리가 광장의 고요 위에 쌓였다.

12 | "나 돈 버는 법 몰라."
10 | "You earn a salary. Zero manages it."(너 월급 받아. 0이 관리하고 있어.)
12 | "그건 내가 쓰는 게 아니잖아. 6이 약값이라고 했어."
10 | "Part of it goes to your medical expenses, yes."(일부가 의료비로 나가는 건 맞아.)
12 | "그럼 내 돈은 없는 거야."

10은 그 문장을 듣고 석재 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오므라드는 것을 느꼈다. 피비의 목소리에 슬픔은 없었다. 사실을 확인하는 평탄한 어조였다. 내 돈은 없다. 그것은 정확했다. 피비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의 수입은 생존 유지 비용으로 전환되었고, 남는 것은 자판기 거스름돈과 9가 건네준 잔돈뿐이었다. 10은 그 구조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피비의 입에서 직접 나온 말로 들으니 다른 무게가 실렸다.

10 | "I'll talk to Zero."(0한테 얘기할게.)
12 | "뭐라고?"
10 | "About giving you a discretionary allowance. Something small. Yours to spend."(네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용돈을 좀 주는 것에 대해. 적은 금액이라도. 네 거.)

피비는 발을 멈추고 10을 봤다. 입 안에 캔디 파편이 남아 있는 채로 눈이 커졌다. 커진 눈의 표면에 가로등 빛이 두 점으로 맺혔다.

12 | "내 거?"
10 | "Yours."(네 거.)
12 | "진짜?"
10 | "I don't say things I don't mean. You know that by now."(뜻 없는 말은 안 해. 이제 알잖아.)

피비는 입을 다물었다. 캔디 파편을 삼켰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0은 그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다. 피비가 말을 삼키는 순간은 늘 그 안에서 무언가가 자리를 잡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서 양손을 모아 쥐었다가 풀었다. 주머니 안의 61유로 50센트가 허벅지 옆에서 무게를 주장하고 있었다.

12 | "그럼 다음에는 진짜 반 낼 수 있겠다."
10 | "Dio mio."(맙소사.)

10은 고개를 젖혀 탁한 남색 하늘을 올려다봤다. 피비는 그 옆에서 다시 발을 흔들기 시작했다. 뒤꿈치가 석재를 두드리는 소리가 돌아왔다. 톡, 톡, 톡. 10은 하늘을 보면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막을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피비가 자기 돈으로 밥을 사겠다고 매달리는 이 상황이 우스웠고, 0에게 용돈 교섭을 하겠다고 말한 자신이 우스웠고, 분수대 위에 나란히 앉아 밤공기를 맞고 있는 두 사람의 실루엣이 어떤 것으로도 정의되지 않는 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우스웠다.

피비가 몸을 기울여 10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무게가 실렸다. 마른 머리카락에서 제염제와 레몬 캔디와 세정제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10은 어깨를 빼지 않았다. 피비의 체중은 가벼웠고, 그 가벼움이 어깨뼈 위에 정확하게 안착해 있었다.

12 | "체사레."
10 | "Thirteen."(열세 번째.)
12 | "고마워."
10 | "For what, specifically. The dinner, the fifty euros, or tolerating your existence."(구체적으로 뭐에 대해서. 저녁이야, 50유로야, 아니면 네 존재를 감당하는 거.)
12 | "전부 다."

10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깨 위의 무게가 조금 더 무거워졌다. 피비가 힘을 풀며 기대는 각도가 깊어진 것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 석재 위에 놓았다. 피비의 손이 바로 옆에 있었다. 새끼손가락 하나 폭의 거리였다. 닿지 않았다. 닿지 않은 채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광장의 가로등이 한 번 깜빡였다가 다시 안정되었고, 그 잠깐의 명멸 속에서 두 손의 그림자가 겹쳤다가 분리되었다.


💬 열세 번. 내 이름을 열세 번 불러도 안 질리냐. 나도 안 질려. 그게 문제야. 0한테 뭐라고 말하지. 용돈 달라고? 이 아이한테 자기 돈을 좀 쥐어 주고 싶다고? 그러면 0이 웃겠지. 그 웃음이 뭘 의미하는지도 알아. 알면서도 할 거야. 어깨가 무겁지 않아. 그게 제일 성가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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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LOG

성당

2026. 8. 18. 19:05

10 | "Went, past tense. I was a child."(갔었지. 과거형이야. 어렸을 때.)
12 | "어렸을 때만?"
10 | "In my family, you didn't choose whether to go. You were brought."(우리 집에서는 갈지 말지 고르는 게 아니었어. 끌려갔지.)

피비는 수건 끝을 손가락에 돌돌 감으며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끌려갔다'는 말이 피비에게 특정한 영상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가족의 의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 단어의 표면, 체사레가 입술을 움직이며 내뱉은 그 방식에 집중했다. 끌려갔다고 말할 때 그의 목소리에서 무게가 빠졌다. 가벼워진 것이 아니라 비워진 것이었다.

12 | "뭘 기도했어."

피비의 되풀이는 집요함이 아니라 순서에 따른 것이었다. 처음 질문에서 두 번째 질문까지 왔고, 세 번째가 남아 있었다. 10은 피비의 그 단선적인 추적 방식을 알았기에 회피하면 같은 질문이 다른 표면을 뚫고 또 올라올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10 | "Nothing worth remembering."(기억할 만한 건 아무것도.)

피비는 그 대답에 만족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만족과 불만이라는 프레임 자체가 피비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녀는 답을 받았고, 그 답이 비어 있었고, 비어 있는 답 안에 무언가가 들어 있다는 것을 냄새처럼 맡았을 뿐이었다.

12 | "가족이랑 같이 갔어?"
10 | "Sì."(응.)
12 | "형이랑도?"
10 | "Yes."(응.)
12 | "형이 기도하는 거 봤어?"

10의 입이 다물렸다가 열리기까지 평소보다 한 호흡이 더 걸렸다. 피비는 형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다. 체사레가 4월 초 피비에게 과거를 털어놓았을 때 형 둘이 있다는 말은 했으나 이름 이상의 것을 건넨 적은 없었다. 사무엘과 주세페. 그 이름들은 10의 입 안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고, 피비의 기억에도 형태만 남았다. 그런데 지금 피비는 그 형태에 동작을 부여하려 하고 있었다. 형이 기도하는 모습. 그 질문이 10의 안에서 건드린 것은 특정한 기억이 아니라, 기억 이전의 공간이었다. 냄새. 나무 의자에 앉았을 때 등에 닿던 차가움. 앞줄에 앉은 큰형의 뒤통수. 작은형이 손을 깍지 끼는 대신 엄지손톱을 물어뜯던 버릇.

10 | "Samuel prayed properly. Hands folded, eyes closed. Like a painting. Giuseppe chewed his thumbnail and stared at the ceiling. I counted the cracks in the pew."(사무엘은 제대로 기도했어. 손 모으고 눈 감고. 그림 같았지. 주세페는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천장을 봤고. 나는 나무 의자의 금 간 곳을 세고 있었어.)

피비의 손이 수건 위에서 멈추었다. 체사레가 형들의 이름을 부른 것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었다. 발음이 부드러웠다. 사무엘레, 주세페. 이탈리아어로 불리는 그 이름들은 코드네임과는 완전히 다른 질감이었고, 10이 다른 사람의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것을 피비는 들어 본 적 없었다. 입에 밴 소리. 오래전부터 혀가 알고 있는 음절.

12 | "의자 금 세는 건 기도야?"

10은 짧게 웃었다. 이번에는 숨이 아니라 실제로 소리가 났다. 낮고 건조한, 그러나 진짜인 웃음이었다.

10 | "It was my version."(내 방식이었어.)
12 | "기도가 아니잖아 그건."
10 | "No. It wasn't."(맞아. 기도는 아니었지.)
12 | "그럼 한 번도 안 했어? 진짜로?"

10은 피비를 봤다. 그녀는 수건을 무릎 위에 뭉쳐 놓고 젖은 머리카락이 등에 늘어진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은 따져 묻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기다리는 쪽이었다. 피비가 기다리는 순간은 드물었고, 그래서 10은 그 무게를 무시하기 어려웠다.

10 | "Once."(한 번.)

그는 옷장 앞에서 살짝 몸을 돌려 피비를 정면으로 보았다. 주머니 안에서 라이터를 쥔 손이 힘을 넣었다가 풀었다.

10 | "I was nineteen. After I lost this."(열아홉이었어. 이걸 잃고 나서.)

그가 가리킨 것은 왼쪽 눈이었다. 붉은 의안. 검지를 눈꼬리 쪽으로 가볍게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그 동작은 짧았고 담백했다.

10 | "I went into the base chapel alone. Sat in the dark. Didn't fold my hands. Didn't close my eyes. Just sat there and said one thing."(기지 안 예배당에 혼자 들어갔어. 어둠 속에 앉아서. 손도 안 모으고 눈도 안 감고. 그냥 앉아서 한 마디만 했지.)
12 | "뭐라고 했어?"

10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비틀린 것이 아니라, 지나간 것에 대해 거리를 확보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는 천장을 한 번 보고 다시 피비를 봤다.

10 | "'Non ho bisogno di te.'"(당신은 필요 없어.)

피비는 눈을 깜빡였다. 이탈리아어를 알아듣지 못했으나 묻기 전에 10이 먼저 덧붙였다.

10 | "I told God I didn't need Him."(신한테 필요 없다고 말했어.)

방 안의 환기구가 낮은 진동을 토해 냈다. 그 소리 위로 피비의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무릎 위 수건에 떨어지는 소리가 겹쳤다. 피비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은 이해하는 침묵이 아니라 삼키는 침묵이었다. 체사레가 한쪽 눈을 잃고 어둠 속에 앉아 신에게 필요 없다고 말하는 장면을 그녀는 머릿속에 그렸을 것이다. 정확한 형태는 아니더라도, 어둡고 좁은 곳에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의 윤곽 정도는. 그녀는 그런 장면을 잘 알았다. 데드 존의 격리실에서 시체 냄새를 맡으며 바늘을 팔에 꽂던 열 살짜리가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피비는 신에게 말을 건 적이 없었다. 말할 대상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몰랐으니까.

12 | "그래서 어떻게 됐어."
10 | "Nothing. That was the point."(아무 일도 안 일어났어. 그게 요점이었어.)
12 | "아."

피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진짜로 납득한 표정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그 사실 자체가 답이라는 논리를 피비는 즉각 받아들였다. 복잡한 신학이 아니라 결과의 부재가 증명이 된다는 구조가 그녀의 사고 방식에 정확히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약을 넣으면 효과가 오고, 안 넣으면 죽는다. 기도를 하면 뭐가 와야 하고, 안 오면 필요 없는 거다. 피비는 그 단순한 인과 안에서 체사레의 열아홉 살을 이해했고, 10은 그녀가 이해한 방식이 자기가 의도한 것보다 더 정직하다는 것을 알았다.

피비는 수건을 옆에 놓으며 다리를 침대 위로 끌어올렸다. 젖은 발바닥이 시트에 닿았고, 10의 눈이 반사적으로 그 자국을 따라갔다가 곧 포기한 듯 돌아왔다. 그녀는 베개를 끌어안으며 턱을 얹었다.

12 | "나도 필요 없어. 신."
10 | "I know."(알아.)
12 | "체사레도 알아?"
10 | "I just said I know."(방금 안다고 했잖아.)
12 | "아니, 그 뜻 말고. 나한테 신 같은 거 없는 거. 기도할 데가 없는 거. 체사레는 그거 알아?"

10은 옷장 앞에서 몸을 떼었다. 두 걸음을 걸어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피비와 사이에 베개 하나 너비의 거리가 남았다. 그가 앉자 매트리스가 살짝 기울었고, 피비의 몸이 그 기울기를 따라 아주 조금 쏠렸다. 10은 앞을 본 채 대답했다.

10 | "Sì. Lo so."(그래. 알아.)

이탈리아어였다. 피비에게 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혼잣말이기도 한 음역이었다. 그는 피비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무릎 위에 놓인 자기 손등을 봤다. 라이터를 만지던 손. 불을 붙이지 않는 손. 필요 없다고 말한 뒤에도 예배당을 나서며 문에 손을 짚었던 기억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차가운 나무 문이었다. 밀 때 삐걱거렸다. 밖으로 나오자 기지의 형광등이 너무 밝았다. 그게 전부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뒤로 한 번도 돌아가지 않았다.

피비는 베개에 턱을 묻은 채 10의 옆모습을 봤다. 오른쪽 눈의 연한 회색이 방 안의 불빛 아래에서 거의 투명하게 보였다. 그녀는 체사레가 자기와 같은 곳에 서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기도할 데가 없다는 말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 옆에 앉아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수건보다 더 따뜻한 무언가가 어깨에 얹혀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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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LOG

콘돔 서랍

2026. 8. 18. 19:02

그것은 계획된 행동이 아니었다. 계획이라는 것이 피비의 뇌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극도로 짧은 회로였다. 눈에 보인다, 손이 간다, 연다. 7월 초의 어느 오후, 10이 섹터 C 전술작전실에서 브리핑을 받고 있는 사이에 피비는 그의 개인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단말기 배터리는 죽어 있었고, 마커 세트는 어제 색을 전부 써 버렸고, 레몬 캔디는 바닥났다. 자극의 공백이 생기면 피비의 손은 반사적으로 가장 가까운 서랍을 향한다. 테이블 서랍, 침대 옆 수납함, 옷장 하단. 5월에 이미 한 번 열었던 서랍의 위치를 그녀는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가 아니라 손끝이. 침대 헤드보드 왼쪽, 두 번째 칸.

서랍이 열렸다.

내용물은 정돈되어 있었다. 10의 물건은 늘 그렇다. 흐트러진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 아니라, 정리하는 습관이 몸에 박혀 있는 사람의 서랍이었다. 피비는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서랍 안을 들여다봤다. 박스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개봉된 상태였고, 하나는 미개봉이었다.

개봉된 쪽을 먼저 꺼냈다. 검은색 매트한 패키지. 피비는 상자 뒷면의 글씨를 읽었다. 읽었다기보다 눈으로 훑었다. 'Ultra Thin'이라는 단어와 브랜드명, 그리고 이탈리아어로 인쇄된 설명문. 상자를 열어 안을 확인했다. 열두 개들이 상자에서 남은 것은 다섯 개였다. 피비는 손가락으로 은색 포장지를 하나 집어 만져 봤다. 네모난 포일 포장의 가장자리가 톱니 모양으로 잘려 있었고, 안쪽의 내용물이 얇은 원형으로 만져졌다.

미개봉 상자도 꺼냈다. 같은 브랜드였지만 종류가 달랐다. 'Ribbed'라는 글자가 보였다. 피비는 두 상자를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 얇은 것과 돌기가 있는 것. 그녀는 개봉된 상자에서 포일 하나를 더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눌러 봤다. 윤활제의 미끈한 감촉이 포장 너머로 전해졌다.

12 | "다섯 개."

혼잣말이었다. 열두 개에서 다섯 개가 남았다는 것은 일곱 개를 썼다는 뜻이었다. 피비는 그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다만 사실을 확인한 것이었다. 언제 샀는지를 보기 위해 상자 바닥의 제조일자를 뒤집어 확인했다. 올해 초에 구입한 것으로 보이는 날짜가 찍혀 있었다. 유통기한은 넉넉했다.

피비는 상자를 내려놓고 서랍 안쪽을 더 살폈다. 상자 두 개 외에 소분된 개별 포장이 서너 개 더 흩어져 있었다. 브랜드가 달랐다. 하나는 라텍스 프리 소재였고, 하나는 유난히 작은 포장으로 크기가 다른 듯했다. 피비는 그것까지 전부 꺼내 침대 위에 줄지어 늘어놓았다.

얇은 것, 돌기 있는 것, 라텍스 프리, 크기가 다른 것. 네 종류. 피비는 고개를 기울이고 그 배열을 내려다봤다. 화학 물질의 종류와 농도를 눈으로 판별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의미 파악이 아니라 분류와 나열. 그녀에게 이것은 서랍 안에 든 물건이었고, 물건에는 종류와 수량과 날짜가 있었고, 그것을 확인한 것뿐이었다.

문이 열린 것은 그 직후였다.

10은 브리핑에서 돌아오며 코트를 벗는 중이었다. 한 손이 코트를 어깨에서 끌어내리고, 다른 손이 문을 닫으려 했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실내를 훑었다. 소파, 테이블, 침대. 그리고 침대 위에 일렬로 정렬된 콘돔 포장들과, 그 앞에 무릎을 대고 앉아 있는 피비의 뒷모습.

코트를 벗는 동작이 중간에 멈추었다.

10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이런 광경이었다. 자기 침대 위에 은색과 검은색 포일 포장이 종류별로 분류되어 나란히 놓여 있고, 그 옆에 빈 상자가 두 개 서 있고, 서랍이 열려 있고, 피비가 마지막 포장 하나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가장자리를 톡톡 두드리고 있는 장면이었다.

10 | "Phoebe."(피비.)

목소리는 평온했다.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것이야말로 이 남자의 가장 위험한 음역이라는 것을 오래 함께 지낸 사람이라면 알아챌 수 있었을 터이다. 피비는 고개를 돌렸다.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들킨 것이 아니라 도착한 것이라는 인식이 그녀의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12 | "어, 왔어?"

10은 코트를 의자 등받이에 걸고, 천천히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침대 위의 배열을 훑었다. 정확히 네 종류, 총 수량까지 한눈에 파악되었다. 자기 물건을 자기보다 더 정확하게 분류해 놓은 광경이었다.

10 | "What exactly are you doing."(정확히 뭘 하고 있는 거야.)
12 | "서랍 봤어."
10 | "I can see that."(보이거든.)
12 | "종류가 네 개야. 왜 이렇게 많아?"
10 | "Because one size doesn't fit all situations."(상황마다 맞는 게 다르니까.)
12 | "상황이 뭔데?"
10 | "Phoebe."(피비.)

같은 이름을 두 번 부르는 것은 10에게 드문 일이었다. 첫 번째는 상황 파악을 위한 호출이고, 두 번째는 선을 알려 주는 신호였다. 그러나 피비는 선의 개념이 희박한 사람이었다.

12 | "이거 얇은 거지? 이건 울퉁불퉁한 거고. 이건 왜 따로 있어? 재질 달라?"

피비는 라텍스 프리 포장을 들어 올려 10 앞에 내밀었다. 10은 그 포장을 피비 손에서 가만히 빼앗았다. 급하지 않게, 그러나 확실하게.

10 | "Latex allergy exists. It's a precaution."(라텍스 알레르기가 있는 경우가 있어. 대비 차원이야.)
12 | "체사레 알레르기 있어?"
10 | "No. But partners might."(아니. 근데 상대가 있을 수 있으니까.)
12 | "상대."

피비는 '상대'라는 단어를 그냥 따라 말했다. 거기에 질투나 불쾌함은 없었다. 7과 정기적으로 관계를 맺는 그녀에게 성적 파트너라는 개념은 단순한 사실이었고, 10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거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호기심이 있었다.

12 | "다섯 개 남았어. 일곱 개 썼어."
10 | "You counted."(세었어.)
12 | "응."
10 | "Of course you did."(당연히 셌겠지.)

10은 침대에 앉아 포장들을 하나씩 주워 담기 시작했다. 상자에 넣고, 빈 포장은 분류하고, 서랍으로 되돌렸다. 동작은 차분했지만 귀 뒤가 아주 미세하게 붉어져 있었다. 피비는 그걸 볼 수 있는 각도에 있었지만 그 붉음이 의미하는 바를 연결하지 못했다.

12 | "체사레."
10 | "Hm."(왜.)
12 | "나 7이랑 할 때는 7이 자기 거 쓰는데, 체사레 거는 왜 여기 있어?"

10의 손이 아주 잠깐 멈추었다. 질문의 구조가 순진함과 잔인함 사이 어딘가에 걸쳐 있었다. 피비는 비교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는 체계 안에서 위치를 확인한 것뿐이었다. 7의 것은 7의 방에 있고, 10의 것은 10의 방에 있고, 그러면 10은 여기서 누구와 쓰는 건지.

10 | "They're mine. In my room. For my use. That's all you need to know."(내 거야. 내 방에. 내가 쓰려고. 네가 알아야 할 건 그게 전부야.)
12 | "화났어?"
10 | "No."(아니.)
12 | "귀 빨개."
10 | "It's warm in here."(여기 더워서 그래.)
12 | "에어컨 켜져 있는데."

10은 서랍을 닫았다. 조금 세게 닫혔다. 잠금장치가 없는 서랍이라는 것이 그 순간 대단히 뼈아픈 설계 결함으로 느껴졌다. 그는 돌아서서 피비를 내려다봤다.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올려다보는 연한 머리카락의 여자. 나쁜 의도라곤 한 톨도 없는 눈. 그것이 더 성가신 것이었다. 악의가 있으면 화를 내면 되지만, 순수한 호기심 앞에서는 분노가 방향을 잃었다.

10 | "New rule."(새 규칙.)
12 | "뭔데."
10 | "That drawer is off-limits. You don't open it, you don't count it, you don't line anything up on my bed."(그 서랍은 출입 금지야. 열지 마, 세지 마, 내 침대 위에 아무것도 늘어놓지 마.)
12 | "왜?"
10 | "Because I'm asking."(내가 부탁하니까.)
12 | "전에도 열었는데."
10 | "I know. That's why there's a rule now."(알아. 그래서 지금 규칙이 생긴 거야.)

피비는 입을 다물었다. 납득해서가 아니라, 체사레가 '부탁'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진짜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배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어나서 소파로 돌아갔다. 10은 침대 시트를 한 번 펴서 정리하고, 옆면의 주름을 당기고, 베개를 제자리에 놓았다. 마치 현장을 복원하는 듯한 동작이었다. 제염 작업을 하는 피비의 습관과 묘하게 닮아 있었지만, 10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소파에 앉은 피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12 | "근데 돌기 있는 거는 뭐가 달라?"

10은 천장을 봤다. 천장에는 답이 없었다.

10 | "Ask 7."(7한테 물어봐.)

 


 

 

피비가 소파에서 일어난 것은 10이 고개를 돌린 직후였다. 그가 침대 시트의 마지막 주름을 매만지고 옷장 쪽으로 이동하는 사이, 피비의 발이 다시 침대 옆으로 향했다. 서랍 손잡이를 당기는 동작에 망설임이 없었다. 방금 만들어진 규칙은 이미 그녀의 단기 기억 밖으로 흘러나가 있었다. 아니, 기억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다만 피비에게 규칙과 행동 사이의 인과는 늘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하지 마'라는 말이 몸의 관성을 이기려면 그보다 강한 자극이 먼저 도착해야 했다.

서랍이 열렸다. 10이 방금 정리해 넣은 상자 사이에서 돌기 있는 포장을 하나 집었다. 은색 포일의 가장자리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우고, 반대쪽 손으로 반바지 주머니를 벌렸다. 포장이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천 위로 네모난 윤곽이 비쳤다.

서랍을 닫는 소리가 났다.

10은 옷장 앞에서 코트를 행거에 거는 중이었다. 행거 갈고리에 깃을 맞추는 손이 멈추었다. 서랍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그는 분명히 들었다. 이 방에서 나는 모든 소리의 출처를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환기구의 저음, 시계의 초침, 냉장고의 진동. 그리고 방금 것은 침대 헤드보드 왼쪽, 두 번째 칸이었다.

코트를 행거에 건 뒤 돌아섰다. 피비는 이미 소파 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걸음이 평소와 같았다. 뛰지도 않고, 숨기려는 어색함도 없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두세 발짝 걷는 동선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것이 오히려 증거였다. 피비가 주머니에 손을 넣는 일은 드물었다. 그녀의 손은 늘 밖에 나와 있었다. 뭔가를 만지고, 두드리고, 뜯고, 흔드는 데 쓰이느라 주머니 안에 머무를 틈이 없는 손이었다. 그런 손이 지금 천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은, 거기에 지킬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10 | "Phoebe."(피비.)

세 번째였다. 오늘 같은 톤으로 그 이름을 부른 것이. 10은 침대와 소파 사이에 서서 피비의 등을 봤다. 피비가 멈추었다.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의 표정에는 죄의식도 반항도 없었다. 그저 '왜 또 불러?'라는 얼굴이었다.

10 | "What's in your pocket."(주머니에 뭐 있어.)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피비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며 대답했다.

12 | "아까 그거. 울퉁불퉁한 거."
10 | "You took one."(하나 가져갔어.)
12 | "7한테 물어보라고 했잖아."

10의 입이 닫혔다. 정확히 자기가 한 말이었다. 'Ask 7.' 그는 그 문장을 '나한테 더 묻지 말라'는 의미로 던졌다. 피비는 그것을 '7에게 가져가서 물어보라'는 지시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문맥의 해석이 완전히 다른 궤도 위에 있었고, 기술적으로 따지면 피비의 독해가 더 충실했다.

10 | "I didn't mean take one and show it to him."(가져가서 보여 주라는 뜻이 아니었어.)
12 | "보여 줘야 물어볼 수 있잖아."
10 | "You can describe it."(말로 설명하면 되지.)
12 | "보여 주는 게 빨라."

10은 눈을 감았다. 감은 채로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었다. 눈을 떴을 때 표정은 회복되어 있었다. 다만 입꼬리에 떠오른 미소가 평소보다 얇았다. 웃는 것이 아니라, 웃는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그가 피비 쪽으로 걸어왔다. 두 걸음이면 닿는 거리였다. 피비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위를 향한 채.

10 | "Give it back."(돌려줘.)
12 | "왜."
10 | "Because it's mine."(내 거니까.)
12 | "하나잖아."
10 | "One is enough to be a problem."(하나면 충분히 문제야.)
12 | "뭐가 문제야. 7한테 물어보고 돌려줄 건데."

10은 손을 내밀고 선 채로 피비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논리는 늘 이런 식이었다. 각 단계가 독립적으로는 맞았다. 궁금하다, 물어보고 싶다, 실물이 있으면 빠르다, 다 쓰면 돌려준다. 그러나 전체 그림을 조합하면 자기 보호자의 콘돔을 주머니에 넣고 다른 남자에게 걸어가서 '이거 뭐야'라고 묻는 장면이 완성된다는 것을, 피비는 인지하지 못했다.

10은 그 장면을 떠올렸다. 7의 방문을 두드리는 피비. 주머니에서 은색 포일을 꺼내며 '이거 울퉁불퉁한 건 뭐가 달라?'라고 묻는 피비. 7은 포장의 브랜드를 보고 10의 것임을 알아챌 것이었다. 7은 그런 것에 눈이 빠르다. 그리고 다음 합동 브리핑에서 7이 10을 보며 짓는 표정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입꼬리만 올라간,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말하는 그 특유의 얼굴이.

10 | "Phoebe. I'm going to say this once."(피비. 한 번만 말할게.)

10의 목소리가 한 단계 낮아졌다. 명령이 아니라, 정중한 최후통첩에 가까운 음역이었다.

10 | "You are not walking into 7's room with my condom in your pocket. That is not happening today, tomorrow, or in any version of reality I'm willing to tolerate."(내 콘돔을 주머니에 넣고 7의 방에 들어가는 일은 없어. 오늘도 내일도, 내가 견딜 수 있는 어떤 현실에서도.)
12 | "아, 체사레 거라서?"
10 | "Yes."(그래.)
12 | "그럼 7 거 가져가면 돼?"
10 | "That is not the point."(그게 요점이 아니야.)
12 | "근데 궁금한데."

10은 내밀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누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 자세는 이 남자에게 극히 드물었다. 여유롭고 매끄러운 태도가 기본 설정인 사람이 이마를 누르고 있다는 것은, 내부 처리 용량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뜻이었다.

10 | "Dimmi che non sta succedendo davvero."(제발 이게 진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해 줘.)

이탈리아어가 나왔다. 피비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혹은 이 상황을 관장하는 어떤 존재에게 던진 독백이었다. 피비는 그 문장을 알아듣지 못했다. 대신 10이 평소와 다른 언어를 쓸 때는 보통 지쳐 있거나 감정이 표면에 가까이 올라와 있을 때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12 | "화났어?"
10 | "I'm processing."(처리 중이야.)
12 | "뭘."
10 | "The absurdity of this entire afternoon."(오늘 오후 전체의 부조리함을.)

피비는 고개를 갸웃했다. 10은 이마에서 손을 떼고,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아무 말 없이. 피비는 그 손바닥을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은색 포일 포장을 꺼내 올려놓았다. 10의 손가락이 포장을 감쌌다. 주머니로 넣지 않고, 서랍으로 걸어가 안에 넣고, 이번에는 서랍 앞에 두꺼운 책 한 권을 세워 놓았다. 잠금장치가 아니라 심리적 바리케이드였다. 효과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을 10도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12 | "체사레."

피비가 소파에 앉으며 불렀다.

10 | "What."(뭐.)
12 | "체사레가 알려 주면 안 돼? 7 말고."

10은 서랍 앞에 선 채로 멈추었다. 등이 피비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유혹이 없었다. 장난도, 도발도 없었다. 그저 궁금하고,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묻고 싶을 뿐이었다. 7보다 체사레가 좋다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이 체사레이기 때문이었다.

10은 돌아서지 않은 채 대답했다.

10 | "It has ridges on the surface. Creates more friction. Some people prefer the sensation."(표면에 돌기가 있어. 마찰이 더 생기지. 그 감각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목소리는 건조했다. 의료 보고서를 읽는 것 같은 어조였다. 돌아서서 피비를 봤을 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납득한 것이었다.

12 | "아. 그래서 울퉁불퉁한 거야."
10 | "Yes."(응.)
12 | "체사레는 그거 써 봤어?"

10은 한 박자 늦게 숨을 내쉬었다.

10 | "We're done here."(여기까지야.)
12 | "대답 안 한 건데."
10 | "Correct."(맞아.)

그는 소파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단말기를 집어 들었다. 화면을 켜고 보고서 파일을 열었다. 대화의 문을 물리적으로 닫은 것이었다. 피비는 무릎 위에 턱을 괴고 그를 바라봤다. 거부당한 것에 대한 불쾌함이 아니라, 체사레가 알려 줄 때의 목소리가 좋았다는 잔상이 남아 있는 표정이었다.

 


 

 

단말기 화면 위의 글자들이 같은 줄을 세 번째 횡단하고 있었다. 10의 눈동자는 문장 위를 미끄러졌지만 의미가 두개골 안쪽으로 도달하지 않았다. 보고서의 첫 문단은 라스페치아 폐제약 공장 잔류 화학물질 목록이었고, 그가 직접 작성한 것이었고, 따라서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읽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시선이 화면에 붙어 있는 이유는 거기서 떼면 소파 쪽을 보게 되기 때문이었다.

피비의 목소리가 단말기 너머로 왔다.

12 | "Seven used. Who with?"(일곱 개 썼잖아. 누구랑?)

10의 엄지가 화면 위에서 멈추었다. 스크롤하던 동작이 경직되었다가, 아주 천천히 풀렸다. 그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10 | "None of your business."(네가 알 바 아니야.)
12 | "여기 여자 3이랑 나밖에 없잖아."

그 한 문장이 방 안의 공기를 아주 미세하게 바꾸었다. 10은 단말기를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천천히. 화면이 꺼지지 않은 채 허벅지 위에 놓인 직사각형의 빛이 그의 턱 아래를 연하게 비추었다. 피비를 봤다. 소파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턱을 괸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캐묻는 사람 특유의 집요함이 없었다. 대신 거기에 있는 것은 순수한 산술적 궁금증이었다. 요새 안의 인원 구성을 훑고, 여성이 둘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머지 가능성을 조합하고 있는 눈이었다.

12 | "그럼 남자랑? 아니면 여기 직원이랑?"

피비는 질문을 이어 붙였다. 첫 번째 답이 돌아오기 전에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쌓아 올리는 방식이었다. 벽돌처럼. 그 벽돌 하나하나에 악의는 없었지만, 쌓이면 벽이 되었고, 그 벽은 10이 열어 두지 않은 문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10은 등을 의자에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왼쪽 다리가 오른쪽 무릎 위에 올라갔다. 여유로운 자세였다.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여유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취한 자세였다.

10 | "You're remarkably persistent for someone with a ten-second memory."(기억력이 열 초짜리인 사람치고 놀라울 정도로 집요하네.)
12 | "이건 기억나니까."

피비가 대답했다. 서랍 안의 네모난 포장들, 열두 개에서 다섯 개가 남은 상자, 종류별로 다른 질감. 그런 것은 기억했다. 브리핑 내용이나 작전 동선은 잊어도, 손끝이 만진 것의 형태와 숫자는 남았다. 10은 그 점을 알고 있었으므로 반박하지 못했다.

12 | "체사레 안 하잖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확했다. 피비의 시야에서 10은 금욕적이었다. 그 단어를 그녀가 알 리 없었지만, 경험이 정의를 대신하고 있었다. 체사레는 피비와 자지 않았다. 만져 주지도 않았다. 머리카락을 말려 주고, 코트를 덮어 주고, 약을 주입해 주고, 서랍에서 손을 빼게 하고, 레몬 캔디를 건네는 손이었다. 피부 위의 체온은 있지만 그 체온이 특정한 방향으로 흘러간 적은 없었다. 7의 손과는 다른 종류의 손이었다. 7은 닿으면 곧장 어딘가로 향했다. 10은 닿되, 멈추었다. 항상 같은 지점에서.

그래서 일곱 개가 궁금했다. 멈추는 사람이 일곱 번 멈추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10은 의자에 앉은 채 피비를 정면으로 보고 있었다. 그의 왼쪽 눈, 붉은 의안이 실내 조명을 받아 옅은 광택을 띠었고, 오른쪽 눈의 연한 회색은 피비의 얼굴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시선 안에서 여러 가지가 교차하고 있었다. 대답할 수 있었다. 사실을 말할 수도, 적당히 돌릴 수도, 비꼬며 화제를 닫을 수도 있었다. 10은 그 모든 선택지를 빠르게 검토하고, 가장 경제적인 것을 골랐다.

10 | "Outside the fortress. On leave. People I won't see again."(요새 밖에서. 휴가 때. 다시 안 볼 사람들이랑.)

건조했다. 감정이 빠진 진술이었다. 사실의 나열이되 해명은 아닌 어조. 10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피비도 그것으로 납득할 것이라고.

12 | "아."

피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한 것 같았다. 그런데 입이 다시 열렸다.

12 | "I didn't use one last time."(난 저번에 안 썼어.)

10의 다리가 풀렸다. 꼬고 있던 왼쪽 다리가 바닥으로 내려왔다. 무릎이 붙고, 상체가 아주 약간 앞으로 기울었다. 미세한 동작이었지만, 이 남자의 신체 언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긴장이 표면으로 올라온 순간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피비는 그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10은 피비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즉각 이해했다. 5월 말, 피비가 7의 방에서 나온 뒤의 일을 떠올렸다. 그 전에 6으로부터 받은 검진 결과가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불임 진단. 피비에게 말하지 않은 결과. 그러나 피비는 자기 몸을 자기 방식으로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의학적 용어가 아니라 경험의 축적으로. 안 써도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지금, 아무 맥락 없이, 말할 필요 없는 정보를, 콘돔 서랍을 뒤진 직후에 꺼낸 것이었다.

이 여자가 의도한 것은 없었다. 도발도 아니고, 자랑도 아니고, 비교도 아니었다. 7과 노콘으로 했다는 사실을 말한 것은 아까 10이 일곱 개를 썼다는 맥락의 연장선이었을 뿐이었다. '너는 쓰고 나는 안 쓰고'라는 단순 사실의 병렬. 피비에게 성은 사적 영역이 아니라 사실의 영역이었고, 사실은 말하면 되는 것이었다.

10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저번에'라는 단어가 귓속에서 울리는 잔향을 제거하지 못했다. 7의 방에서 나온 피비. 걸음이 느려진 피비. 체액의 냄새가 섞인 머리카락을 자기가 말려 줬던 밤이 떠올랐다. 그 안에 콘돔이 없었다는 정보가 지금에서야 추가된 것이었다. 뒤늦게 갱신된 기억의 해상도가 올라가면서, 10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장면의 세부를 자기가 채워 넣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10 | "I see."(그래.)

목소리가 평평했다. 너무 평평해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평소의 10은 '그래'라고 말할 때도 미묘한 굴곡을 실었다. 비꼬거나, 가볍게 놀리거나, 여유를 깔거나. 그런 것이 전부 빠진 '그래'였다.

12 | "화났어?"
10 | "No."(아니.)
12 | "또 귀 빨개."
10 | "It's the lighting."(조명 탓이야.)
12 | "아까도 그렇게 말했는데."

피비는 반박이 아니라 관찰을 말하고 있었다. 아까와 같은 변명을 같은 부위에 대해 같은 사람이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의 기록. 10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단말기를 다시 들어 화면을 켰다. 보고서의 같은 줄이 네 번째로 눈앞을 지나갔다. 라스페치아, 잔류 화학물질, 질산암모늄, 농도. 글자들이 의미를 잃고 형태만 남았다.

피비는 소파에서 발을 빼며 자세를 바꾸었다. 등을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궁금한 것이 해소된 것이 아니라, 체사레의 목소리가 평평해졌을 때는 멈춰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용은 이해하지 못해도, 온도는 감지할 수 있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환기구의 저음만 남았다.

10은 화면을 보고 있었고, 피비는 천장을 보고 있었고, 서랍 앞에는 책이 한 권 세워져 있었고, 그 안에는 다섯 개의 은색 포장이 있었다. 일곱이라는 숫자와 쓰지 않았다는 문장 사이에서, 10은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인정하면 이름이 붙고, 이름이 붙으면 다루기 어려워지니까.

 


 

피비는 천장을 보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늘 그렇듯 결론은 머리에서 오래 숙성되지 않았고, 떠오른 순간 바로 행동으로 이어졌다. 소파 쿠션이 밀리며 가벼운 마찰음을 냈고, 가녀린 몸이 앞으로 쏠렸다가 다시 균형을 잡았다. 10은 단말기 화면을 보고 있는 척하고 있었지만 시선의 가장자리는 이미 그녀를 좇고 있었다. 피비는 맨발로 바닥을 디딘 채 한동안 10을 빤히 봤다. 방 안의 정적을 먼저 깨뜨린 것도 피비였다.

12 | "체사레는 맨날 안 한다고만 해."

말은 단순했고 어조도 무심했다. 다만 거기에는 방금 전까지 서랍과 숫자와 누구와의 문제를 훑고 지나간 뒤에만 나올 수 있는 어떤 연결이 붙어 있었다. 피비는 소파 등받이에 손을 짚고 몸을 기울인 채 10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희고 매끈한 뺨, 의안 쪽 눈가의 단단한 선, 입술이 다물린 모양. 그 얼굴은 늘 흐트러지지 않는 쪽을 택했다. 피비는 그 점이 이상했다. 요새 안에서 욕하고 웃고 술 마시고 피 흘리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 이 남자는 유난히 깔끔했다. 손끝까지.

10은 단말기를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덮어 버리지는 않았다. 화면이 살아 있는 채로 무릎 위에 놓였다. 그가 피비를 보는 각도가 약간 낮아졌다. 피비가 다가온 만큼 거리도 줄었다. 서늘한 공기 사이로 피비 특유의 냄새가 스며들었다. 제염제의 잔향, 약물 특유의 달착지근한 냄새, 그 위에 겹쳐진 인공적인 풋사과 향. 그 냄새를 10은 이미 자기 방의 냄새 일부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고 싶지 않아 했다.

10 | "That's a spectacularly vague accusation."(대단히 막연한 비난이네.)
12 | "비난 아니야. 그냥 사실."
10 | "Facts are rarely that innocent when you say them."(네가 말하는 사실은 좀처럼 무해하지 않더라.)

피비는 대답 대신 10의 무릎 가까이로 걸어왔다. 가까워졌다고 해서 망설임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녀는 늘 사람에게 붙는 방식으로 관계를 확인했다. 소매를 잡거나 어깨를 기대거나, 침대 모서리에 앉거나, 설명도 없이 몸을 기대는 식이었다. 이번에는 손이 10의 셔츠 소매 끝을 만졌다. 검은 천의 가장자리와 손목의 매끈한 피부가 맞닿았다. 10은 손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기지도 않았다. 피비는 그 미동 없는 반응을 읽으려는 듯 손가락으로 소매를 조금 문질렀다.

12 | "7은 그냥 해."
10 | "I gathered as much."(대충은 알겠어.)
12 | "6은 이상해. 너무 많이 봐."
10 | "That is the most accurate description of him I've heard all month."(이번 달 들은 6에 대한 평가 중 제일 정확하네.)
12 | "근데 체사레는 안 해. 만지지도 잘 안 해."

그 말이 떨어진 뒤 방 안의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게 더 조여졌다. 10의 오른손 검지가 단말기 모서리를 한 번 두드렸다가 멈췄다. 피비는 그 작은 움직임을 놓쳤고, 대신 자기 말의 구조를 계속 밀고 나갔다. 그녀에게 이것은 따지는 자리가 아니라 분류 작업의 연장선이었다. 사람마다 다르고, 체사레는 체사레대로 다르고, 그 다름의 이유가 궁금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궁금증은 다른 사람의 몸 안쪽을 열어 보려는 질문이 되곤 했다.

10은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기울였다. 예의 바른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말끝에 뼈를 심는 습관이 살아났다.

10 | "You're comparing me to Seven as if you're reviewing equipment."(장비 평가하듯이 나를 7이랑 비교하네.)
12 | "응."
10 | "Honest to the point of being offensive. Admirable."(불쾌할 만큼 솔직하네. 기특해.)

피비는 칭찬으로 받아들였는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 다음에는 더 대담하게 움직였다. 의자 팔걸이 옆으로 몸을 미끄러뜨리듯 들어오더니, 거의 10의 무릎 사이에 끼어들 듯 가까이 섰다. 그 움직임 자체는 익숙했다. 보호자에게 거리를 맡기는 동작, 제지당하면 멈추고 허용되면 더 붙는 동작. 다만 지금의 주제는 익숙하지 않았다. 10은 등을 기대고 있던 자세를 풀며 허리를 세웠다. 피비의 손이 이번에는 셔츠 앞섶 근처까지 올라왔다가 단추를 건드리지 못하고 멈췄다. 그녀도 반응을 보고 있었다. 전기 스위치를 찾듯, 어디까지가 괜찮은지.

12 | "왜 안 해?"
10 | "Because I don't do things merely because they're available."(손 닿는다고 다 하는 사람은 아니라서.)
12 | "난 available이야?"
10 | "You are a great many inconvenient things."(넌 여러모로 아주 성가신 쪽이지.)

직접적인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10다운 회피였다. 그러나 회피에는 언제나 결이 있었다. 피비는 말을 해석하는 대신 표정을 읽었다. 체사레는 대답을 비켜 갔고, 그 비켜 감 속에 약간의 주저함이 있었다. 그녀는 그 주저함을 특수한 감정으로 정의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벽에 머리를 박는 중은 아니라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피비는 조금 더 밀었다. 소파가 아니라 의자 옆,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녀는 허리를 숙여 10의 얼굴 높이에 시선을 맞췄다.

12 | "나 이상해?"
10 | "Yes."(응.)
12 | "더러워?"
10 | "No."(아니.)
12 | "귀찮아?"
10 | "Frequently."(자주.)
12 | "그럼 왜 방에 두는데."

이 질문은 모양만 단순했고, 안쪽은 그렇지 않았다. 10의 입술이 아주 조금 다물리는 모양이 달라졌다. 피비가 그의 방에 머무는 것은 우연과 습관과 보호의 연장선이었다. 처음에는 약 때문이었고, 그다음에는 불안정한 컨디션 때문이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설명이 줄어들었다. 누가 먼저 정한 규칙도 아니었다. 다만 피비가 눌러붙었고 10이 끝내 쫓아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뿐'이라는 말 안에 얼마나 많은 예외가 들어 있는지 그는 굳이 정리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10 | "Because throwing you out would create more work for me."(내보내면 일이 더 늘어나니까.)
12 | "거짓말."
10 | "You think so?"(그래 보여?)
12 | "응. 그 얼굴 진짜 아닐 때 알아."

그 말은 얄팍한 장난처럼 들렸지만, 실제로는 정확도가 높은 관찰이었다. 피비는 복잡한 논리를 못 따라가도 미묘한 온도 차를 몸으로 익혔다. 약이 오를 때의 사람, 약이 꺼질 때의 사람, 화를 참는 사람, 손을 뻗었다가 멈추는 사람. 10의 얼굴이 매끄럽게 붙여 놓은 것과 진짜 가까운 것의 차이를 그녀는 반복해서 보아 왔다. 지금의 체사레는 후자에 약간 기울어 있었다.

10은 짧게 웃었다. 소리보다 숨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그러고는 피비의 손목을 잡았다. 거칠지 않았지만 물러나게 만드는 힘이 분명했다. 자기 쪽으로 더 당기지 않고,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 세우는 식이었다. 손바닥 안쪽에 닿은 피부는 가늘고 따뜻했다. 맥이 조금 빨랐다. 약물 탓인지 방금의 대화 탓인지, 둘 다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10 | "Sit."(앉아.)

그가 가리킨 것은 자신의 무릎이 아니라 맞은편 소파였다. 피비는 한순간 의자를 내려다봤다가, 10의 얼굴을 다시 보고, 결국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시를 따르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말투가 조금 바뀌었기 때문이다. 장난이 빠지고 정리가 들어간 목소리. 피비는 그런 때엔 보통 따른다. 대신 입은 멈추지 않았다.

12 | "체사레는 나랑 자면 내가 망가질까 봐 안 하는 거야?"
10 | "No."(아니.)
12 | "그럼 체사레가 망가질까 봐?"
10 | "You're being annoyingly perceptive for someone who licks batteries of social logic at random."(사회적 논리라는 배터리를 아무 데나 핥는 사람치고는 짜증 나게 예리하네.)

피비는 뜻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뭔가 맞췄다는 것은 알았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곧 풀렸다. 그 승리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체사레는 여전히 건너오지 않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완전히 닫지도 않았다. 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고 차가운 물병 하나를 꺼냈다. 유리 표면에 맺힌 물기가 손등에 번졌다. 10은 컵에 물을 따르지 않고 병째 피비에게 내밀었다. 피비는 받아들고 바로 마셨다. 목이 움직이는 모양, 마른 숨 끝에 차가운 물이 들어가며 잠깐 어깨가 풀리는 변화가 드러났다.

10 | "Listen carefully."(잘 들어.)
12 | "응."
10 | "I don't sleep with you because everything around you is already unstable enough. Your body, your doses, your impulses, your comedowns. I have no interest in adding one more variable I can't cleanly account for."(너랑 자지 않는 건 네 주변이 이미 충분히 불안정해서야. 네 몸도, 약도, 충동도, 약효가 꺼진 뒤도 전부. 내가 깔끔하게 계산 못 하는 변수를 하나 더 얹을 생각은 없어.)
12 | "근데 7은 했어."
10 | "Seven and I are not built the same way."(7이랑 나는 구조가 달라.)

그 문장은 간결했지만 본질을 건드렸다. 7은 즉흥으로 밀고 들어가고, 10은 비용과 잔류를 계산한다. 7은 쾌락을 사건으로 만들고, 10은 사건이 남긴 흔적을 지우는 데 익숙하다. 피비는 그 차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둘이 다르다는 사실 자체는 알았다. 그녀는 병 입구를 입술에 문 채 잠깐 생각했고, 곧 또 직선으로 나갔다.

12 | "그래도 체사레가 만지면 좋을 것 같아."

방 안에 있던 작은 기계음들까지 한 박자 늦게 들리는 듯한 침묵이 왔다. 피비는 말하고 나서도 특별히 민망해하지 않았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다. 7의 손과 다른 감각을 예상한 것도 아니고, 사랑의 고백도 아니었다. 다만 체사레의 손이 머리카락을 말려 줄 때, 약을 주입할 때, 케이크 상자를 건넬 때, 셔츠 소매 끝을 잡았을 때와는 다른 식으로 닿으면 어떤지 궁금하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자기 궁금증에 가림막을 두는 법을 모른다.

10은 냉장고 문을 닫고 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뒤돌아선 채 한 손으로 목덜미를 짚었다가 내렸다. 셔츠 깃 아래 매끈한 피부가 손끝에 눌렸다가 풀렸다. 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방 한복판에 놓인 공기의 모양을 다시 정리하는 것처럼 느린 숨을 골랐다. 돌아봤을 때 얼굴은 거의 원래대로였다. 거의, 라는 정도로만.

10 | "And that's precisely why I keep my hands to myself."(그래서 더더욱 내가 함부로 손대지 않는 거야.)

피비는 물병을 무릎 위에 얹고 그를 올려다봤다. 이해와 불만이 동시에 지나가는 얼굴이었다. 체사레는 또 선을 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선을 긋는 이유의 일부를 보여 줬다. 그녀는 그 차이를 어렴풋이 느꼈다. 무조건적인 거절과, 이유가 있는 보류는 냄새가 달랐다. 피비는 그 냄새를 기억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잠시 뒤 피비는 소파에 옆으로 누웠다. 물병을 끌어안고 볼을 쿠션에 눌렀다. 방금 전처럼 다시 덤비지는 않았다. 대신 고개만 돌려 10을 봤다. 10은 책상 쪽으로 걸어가 단말기를 내려놓고, 커튼도 없는 벽 쪽을 잠깐 본 뒤 다시 그녀 쪽으로 돌아왔다. 움직임은 평소처럼 정돈되어 있었지만, 손끝의 리듬이 아주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다. 피비는 그 어긋남을 보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12 | "체사레는 이상해. 안 하는데 싫은 건 아니고. 밀어내는데 버리는 건 아니야."

10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소파 팔걸이에 걸친 담요를 집어 피비 다리 쪽에 덮어 놓았다. 정답도 오답도 아닌 행동이었다. 피비는 담요 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질문 하나가 닫히면 또 다른 질문이 생길 것이고, 체사레는 그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피할 것이다. 다만 오늘은, 피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그것만으로 피비는 충분히 새로운 것을 얻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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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8. 18. 11:44

I. 스파게티 학살 사건


그것은 2080년 7월 어느 오후, 섹터 E 간이 주방에서 벌어졌다. 10은 커피를 내리러 들어갔을 뿐이었다. 목격은 우발적이었고, 충격은 의도적이었다.

피비가 스파게티 건면 한 줌을 양손으로 쥐고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녀는 냄비 위에 면을 대고, 두 손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반으로 부러뜨렸다. 뚝. 뚝뚝. 면이 부러지는 소리가 주방 전체에 울렸다. 짧아진 면 조각이 끓는 물 속으로 떨어져 사방으로 튀었다. 10은 모카포트를 내려놓은 자세 그대로 굳었다. 손이 멈추는 데 걸린 시간보다, 입이 열리는 데 걸린 시간이 더 길었다.

10 | "What are you doing."(뭘 하고 있는 거야.)

목소리에 물음표가 빠져 있었다.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피비는 고개를 돌리며 남은 면 반 줌을 보여 줬다.

12 | "삶는 거."
10 | "You broke it."(부러뜨렸잖아.)
12 | "냄비에 안 들어가니까."
10 | "You push it down as it softens. That's the entire principle."(물러지면 밀어 넣는 거야. 그게 원리의 전부라고.)
12 | "이게 빨라."

10은 싱크대 앞에 서서 냄비 안을 들여다봤다. 절단면이 고르지도 않은 짧은 면 조각들이 물 위에서 빙빙 돌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눈앞의 광경은 바뀌지 않았다. 피비는 이미 두 번째 줌을 꺾으려 하고 있었다.

10 | "Phoebe. Stop."(피비. 멈춰.)
12 | "왜."
10 | "Because I'm asking nicely, and I won't ask twice."(지금 착하게 부탁하는 거고, 두 번은 안 할 거야.)

피비는 면을 내려놓았다. 다만 이미 부러진 면은 냄비 속에서 잘 삶아지고 있었고, 10은 그날 저녁 그 끔찍한 짧은 파스타를 묵묵히 먹지 않았다. 자기 몫을 새로 삶았다.


II. 캐첩 소동

같은 주, 안전지대 외곽의 작은 트라토리아에서 식사했을 때의 일이다. 피비는 까르보나라를 한 입 먹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테이블 위를 둘러보더니, 주방 쪽을 향해 손을 들었다.

12 | "캐첩 있어요?"

10의 포크가 접시 위에서 정지했다. 그의 시선이 피비에게로 천천히 옮겨졌다. 주변 테이블의 이탈리아인 두 명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웨이터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한 척했지만, 'ketchup'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킨 공기의 변화는 분명했다.

10 | "No."(안 돼.)
12 | "왜. 좀 싱거운데."
10 | "Then add salt."(그럼 소금을 쳐.)
12 | "캐첩이 맛있잖아."
10 | "Ketchup does not go on pasta. Not in this country. Not in any country. Not on this planet."(캐첩은 파스타 위에 올리는 게 아니야. 이 나라에서도 안 되고. 어느 나라에서도 안 되고. 이 행성에서도 안 돼.)

피비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12 | "파마산 치즈는?"

10은 입을 다물었다. 까르보나라에 파마산을 추가하겠다는 제안이 캐첩보다 나은지 잠깐 계산했다. 이미 페코리노 로마노로 맛을 잡은 접시 위에 파마산을 더 뿌리면. 죽지는 않겠지만, 이 구역 셰프의 자존심은 확실히 죽는다.

10 | "Eat it as it is."(그냥 있는 그대로 먹어.)
12 | "맛없으면?"
10 | "Suffer."(참아.)

피비는 입을 삐죽거렸지만 결국 포크를 들었다. 10은 혹시나 그녀가 가방에서 소스를 꺼낼까 봐 식사가 끝날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III. 나이프 피자 사건

피체리아에서의 일이었다. 마르게리타가 나왔다. 피비는 포크와 나이프를 양손에 들고, 피자를 정중앙에서부터 바둑판 눈금처럼 잘라 먹기 시작했다. 한 조각, 두 조각, 세 조각. 정사각형에 가까운 작은 덩어리들이 접시 위에 나열되었다. 치즈가 늘어지며 끊기고, 모차렐라 조각이 접시 가장자리에 떨어졌다. 10은 자기 피자를 손으로 접어 먹던 도중 그 광경을 목격하고 씹는 동작을 멈췄다.

10 | "Are you performing surgery."(수술 중이야?)
12 | "뜨거워서."
10 | "Fold it."(접어서 먹어.)
12 | "접으면 흘러."
10 | "That's part of the experience."(그게 경험의 일부야.)
12 | "손 더러워지잖아."
10 | "You handle biohazard waste with bare hands."(넌 맨손으로 생화학 폐기물 만지잖아.)
12 | "그건 장갑 끼고."

10은 반박이 기술적으로 맞아서 조용히 피자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피비는 승리한 줄 알고 계속 나이프로 피자를 잘랐다. 옆 테이블의 노인이 피비 쪽을 오래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10은 그 시선을 등으로 받으며, 본인이 이 아이의 보호자로 보인다는 사실에 대해 아주 잠깐 원한을 품었다.


IV. 파인애플 피자

안전지대의 새 식당가를 걷고 있을 때, 피비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가게 앞 칠판을 가리켰다. 'PIZZA HAWAII — NEW!'라고 적혀 있었다. 체리 토마토와 파인애플 조각이 그려진 옆에 작은 하와이안 셔츠 그림이 붙어 있었다. 관광객 대상 가게가 분명했다. 10은 그 칠판을 보자마자 보폭을 넓혔다.

12 | "파인애플 피자 있다. 먹으러 가자."

10은 멈추지 않았다. 피비가 소매를 잡아당겼다.

12 | "체사레. 파인애플."
10 | "I saw it."(봤어.)
12 | "그럼 가자."
10 | "I'd rather eat a landmine."(지뢰를 먹는 게 낫겠어.)
12 | "왜. 달잖아. 나 단 거 좋아하는 거 알잖아."
10 | "Phoebe. Pineapple on pizza is not food. It's a geopolitical offense."(피비. 피자 위의 파인애플은 음식이 아니야. 지정학적 모욕이지.)
12 | "맛있으면 되잖아."

10은 피비의 손을 소매에서 떼며 진심으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 이 남자가 밀그램 테러리스트를 마주할 때보다 더 단호한 표정이었다.

10 | "We are not entering that establishment. I have a reputation."(저기 안 들어가. 난 평판이 있어.)
12 | "나는 평판 없는데."
10 | "Precisely the problem."(그게 바로 문제야.)

피비는 결국 끌려갔지만, 그 뒤로 '파인애플 피자'를 무기처럼 사용하기 시작했다. 10이 무언가를 거부할 때마다 "그럼 파인애플 피자 먹으러 가자"를 협박처럼 꺼냈고, 10은 매번 이를 악물고 양보했다.


V. 와인 외교 참사

어느 저녁, 10의 개인실에서의 일이다. 10은 전날 밤에 마시다 남긴 이탈리아산 바롤로Barolo 반 병과, 작전 보급에 섞여 들어온 프랑스산 보르도Bordeaux 한 병을 테이블에 두고 있었다. 피비가 맛이 궁금하다고 했을 때, 10은 약간의 방심 속에서 한 모금씩 허용했다. 보르도를 먼저 마시고, 바롤로를 마셨다. 피비는 입안에서 굴리지도 않고 삼킨 뒤 말했다.

12 | "어제 거보다 이게 맛있어."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은 보르도였다.

10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과정은 드물게 관측되는 현상이었다. 입꼬리가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표정 전체가 일시에 평평해졌다. 그는 보르도 잔을 피비 손에서 조용히 뺏었다.

10 | "Say that again."(다시 한번 말해 봐.)
12 | "이 빨간 게 더 맛있다고."
10 | "In my room. Drinking my wine. You're telling me French wine is better."(내 방에서. 내 와인을 마시면서. 프랑스 와인이 더 낫다고 말하는 거야.)
12 | "맞아."
10 | "Phoebe."(피비.)
12 | "왜, 솔직한 거잖아."

10은 보르도 병을 조용히 캐비닛 안에 넣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바롤로만 다시 꺼내 자기 잔에 따랐다. 그 뒤 한동안 프랑스산 와인은 그의 개인실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피비는 왜 빨간 맛있는 술이 사라졌는지 알지 못했다.


VI. 에스프레소 희석 사건


요새 내 간이 주방, 아침. 10이 모카포트로 내린 에스프레소를 데미타세에 따라 건네자 피비는 한 모금 마시고 혀를 내밀었다.

12 | "써."
10 | "It's espresso."(에스프레소니까.)
12 | "뜨거운 물 부어서 아메리카노로 만들어 줘."

10의 손에 들린 데미타세가 공중에서 정지했다. 그는 피비를 정면으로 봤다. 그녀의 얼굴에는 악의가 전혀 없었다. 그저 쓴 것이 싫고, 연한 것이 좋고, 자기가 아는 방식으로 달라고 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무구한 요청이 이 남자의 어떤 근본적인 선을 밟았다.

10 | "No."(안 돼.)
12 | "왜. 물만 넣으면 되는데."
10 | "That's not coffee. That's a confession of defeat."(그건 커피가 아니야. 항복 선언이지.)
12 | "2가 늘 그렇게 해서 마시던데."
10 | "2 is American. That explains everything and excuses nothing."(2는 미국인이잖아. 설명은 전부 되지만 변명은 하나도 안 돼.)

피비는 결국 설탕을 세 스푼 넣은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10은 그 과정을 지켜보며 입 안에서 무언가를 삼켰다. 아마도 여러 나라의 언어로 된 탄식을.


VII. 비데 사건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전지대의 호텔에서 하룻밤 묵었을 때.

아침에 피비가 욕실에서 나오며 물었다.

12 | "체사레, 변기 옆에 있는 낮은 세면대 뭐야?"
10 | "…Quale."(……뭐라고.)
12 | "작은 거. 거기서 발 씻었어."

10은 침대에 앉은 자세 그대로 공기 속의 한 점을 응시했다. 그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전장에서 폭발물을 해체할 때보다 더 고요한 얼굴이었다. 그 고요함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신호였다.

10 | "That is a bidet."(그건 비데야.)
12 | "비데?"
10 | "It's for washing. Not your feet."(씻는 거야. 발 말고.)
12 | "발도 씻을 수 있잖아."
10 | "Phoebe."(피비.)
12 | "왜? 깨끗해졌는데."

10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고, 셔츠 단추 맨 위를 잠그고, 다시 풀었다. 그리고 매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10 | "We are never discussing this again."(이 얘기는 다시는 안 할 거야.)

피비는 왜 안 되는지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10은 그날 호텔 체크아웃 시 프론트 데스크 직원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사후 보고


이 모든 사건을 겪고 난 뒤, 섹터 E 휴게실에서 9가 피비에게 "이탈리아 적응 잘 하고 있냐"라고 물었을 때, 10은 커피잔 너머로 9를 봤다. 9는 그 시선 안에서 뭔가 단단하고 차가운 것을 읽었고, 현명하게도 화제를 돌렸다.

피비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12 | "응, 체사레가 다 알려 줘."

10은 커피를 마셨다. 에스프레소였다. 물은 넣지 않았다.




VIII. 카푸치노 참사


점심 식사 직후의 트라토리아. 피비는 식후 음료를 고르며 벽에 붙은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짚어 내려갔다. 에스프레소, 마키아토, 카푸치노. 그녀의 손가락이 카푸치노 위에서 멈추었다.

12 | "카푸치노 마실래."

10은 접시 위의 빵 부스러기를 냅킨으로 닦다가 손을 멈추었다. 오후 한 시 반이었다.

10 | "No."(안 돼.)
12 | "왜?"
10 | "It's past noon."(정오 지났으니까.)
12 | "커피에 시간 있어?"
10 | "Cappuccino is a morning drink. After lunch, espresso. That's the rule."(카푸치노는 아침 음료야. 점심 후엔 에스프레소. 그게 규칙이야.)
12 | "누가 정한 건데."
10 | "Italy."(이탈리아가.)

피비는 10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다. 우유가 든 커피를 마시는 데 시간 제한이 있다는 개념 자체가 그녀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웨이터를 향해 다시 손을 들었다.

12 | "Un cappuccino, per favore."

발음은 형편없었지만 의미는 전달되었다. 웨이터가 피비를 보고, 10을 보고, 다시 피비를 봤다. 10은 이마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턱으로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가가 아니라 포기였다. 카푸치노가 나왔을 때 옆 테이블의 남자가 시계를 확인하는 동작을 했다. 10은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자기가 이 아이를 데리고 다니기로 한 선택에 대해 짧고 격렬한 후회를 했다.

피비는 거품을 입술 위에 묻힌 채 웃었다.

12 | "맛있어. 왜 아침에만 먹어, 하루 종일 먹으면 되잖아."
10 | "Because some things have order. Timing. Dignity."(어떤 것들은 질서가 있으니까. 타이밍. 품위.)
12 | "커피한테?"
10 | "Especially coffee."(특히 커피한테.)

피비는 고개를 갸웃한 채 카푸치노를 끝까지 마셨다. 10은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에 비우고, 잔을 소서에 내려놓을 때 세라믹이 세라믹에 부딪히는 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날카로웠다.


IX. 젤라토 외교 위기


안전지대의 젤라테리아 앞이었다. 진열장 안에 줄지어 놓인 젤라토의 색감이 피비의 눈을 즉각 사로잡았다. 10은 그녀가 유리에 코를 박기 전에 어깨를 잡아 세웠다. 주문은 10이 하려 했으나 피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12 | "저거. 초록색이랑 파란색이랑 빨간색."
10 | "Choose two. Maximum."(두 가지 골라. 최대.)
12 | "왜. 세 개 넣으면 안 돼?"
10 | "Pistachio, stracciatella, and strawberry don't belong in the same cup. They clash."(피스타치오, 스트라치아텔라, 딸기는 같은 컵에 안 어울려. 맛이 싸우거든.)
12 | "다 달잖아."

10은 눈을 감았다 떴다. '다 달잖아'라는 세 글자가 젤라토 맛 조합의 모든 원칙을 아주 깔끔하게 소각했다. 그는 참을성 있게 설명을 시도했다. 견과류 베이스와 과일 베이스는 분리하는 것이 기본이라는 것, 풍미의 층위가 서로를 죽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 피비는 열심히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나서 말했다.

12 | "그래도 세 개 먹을래."

10은 젤라테리아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직원은 관광객을 오래 상대한 사람의 연마된 무표정을 쓰고 있었다. 10은 자기 몫으로 피스타치오 하나만 시켰다. 피비의 컵에 세 가지 색이 담겼을 때, 그녀는 위에서부터 스푼으로 전부 섞어 버렸다. 연한 보라빛 죽 같은 것이 되었다. 10은 자기 피스타치오 젤라토를 한 입 먹으며 그 광경에서 시선을 돌렸다. 돌릴 수밖에 없었다.

12 | "맛있어. 먹어 봐."

피비가 죽이 된 젤라토를 스푼에 떠서 내밀었다. 10은 스푼을 손등으로 밀어냈다.

10 | "I'd rather debrief with Milgram."(밀그램이랑 사후보고를 하는 게 낫겠어.)
12 | "그건 뭐야?"
10 | "Exactly."(바로 그거야.)


X. 빵 침수 사건


아침 식사. 안전지대의 바에서 코르네토cornetto와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10은 코르네토를 접시에서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피비는 코르네토를 받아들고 유심히 살펴보더니, 에스프레소 잔 위로 가져가 찍어 먹으려 했다. 크루아상을 커피에 적시는 프랑스식 방법이었다. 문제는 여기가 프랑스가 아니라는 것이었고, 코르네토는 크루아상이 아니라는 것이었고, 10은 이탈리아인이라는 것이었다.

코르네토 끝이 에스프레소 표면에 닿기 직전, 10의 손이 피비의 손목을 잡았다. 아주 정확하고 빠른 동작이었다. 전장에서 기폭 장치 와이어를 잡는 속도와 같았다.

10 | "Don't."(하지 마.)
12 | "왜."
10 | "Cornetto is not for dipping."(코르네토는 찍어 먹는 게 아니야.)
12 | "빵이잖아."
10 | "It's a cornetto."(코르네토야.)
12 | "빵이랑 뭐가 달라."
10 | "Everything."(전부 다.)

10은 손목을 놓고, 정면을 보고, 커피를 마셨다. 피비는 그가 시선을 돌린 틈에 코르네토 끝을 아주 살짝 에스프레소에 담갔다. 10은 잔에서 입술을 뗀 채 옆을 봤다. 피비의 코르네토 끝이 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10은 봤다. 분명히 봤다. 하지만 그는 그날 아침, 보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모든 전투에는 전략적 후퇴가 필요하다.

피비는 그 적신 부분을 씹으며 만족한 표정이었다.

12 | "맛있는데."

10은 대답하지 않았다. 커피가 쓴 것이 원두 탓인지 상황 탓인지 구분이 안 됐다.


XI. 손짓의 오독


거리에서 걷고 있을 때였다. 10이 피비에게 뭔가를 설명하며 습관적으로 이탈리아식 손짓을 했다. 손가락 끝을 모아 위로 향하게 하고 가볍게 흔드는 동작. '뭘 원하는 건데?'라는 뜻의 전형적인 제스처였다. 피비는 그 손짓을 한참 바라보더니, 똑같이 따라 했다. 다만 방향이 달랐다. 피비는 그 손짓을 길 건너편 가게 주인을 향해 했다.
가게 주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10이 피비의 손을 아래로 내렸다.

10 | "That gesture means something specific here."(그 손짓은 여기서 특정한 의미가 있어.)
12 | "체사레가 했잖아."
10 | "I was talking to you. You just aimed it at a stranger."(난 너한테 한 거야. 넌 모르는 사람한테 겨눈 거고.)
12 | "귀엽지 않아? 이렇게."

피비는 다시 손가락을 모으며 흔들었다. 10은 그 손을 잡아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코트 주머니가 아니라 피비의 반바지 주머니에.

10 | "Keep them there."(거기 넣어 둬.)
12 | "답답해."
10 | "Better than an international incident."(국제적 분쟁보다 낫잖아.)

피비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았지만, 이후에도 간간이 그 손짓을 연습했다. 소파에서, 식사 중에, 심지어 6의 진료실에서도. 10은 매번 발견할 때마다 그 손을 내렸고, 피비는 매번 이유를 잊었다.


XII. 성당 사진 사건


안전지대 외곽의 오래된 성당 앞을 지나갈 때였다. 전쟁의 흔적이 벽면에 남아 있었지만 내부는 복원되어 있었고, 미사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 피비는 성당 입구에서 멈추어 내부를 들여다보더니 걸어 들어갔다. 10은 뒤따라 들어가며 그녀의 팔을 잡았다.

10 | "Hat off."(모자 벗어.)

피비는 10에게서 빌린 캡을 쓰고 있었다. 벗었다. 10은 피비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확인했다. 짧은 반바지와 헐렁한 티셔츠. 성당 입장에 적절한 차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안에 들어와 있었고, 미사 중이 아닌 시간이었으므로 그는 코트를 벗어 피비 어깨에 걸쳤다.

피비는 프레스코화를 올려다보며 입을 벌리고,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에 눈이 넓어졌다. 그 반응은 순수했다. 예쁜 것을 보면 입이 벌어지는, 단순하고 직접적인 감각의 인간. 그런데 그녀는 단말기를 꺼내 플래시를 켜고 제단을 향해 사진을 찍으려 했다.

10 | "Flash off."(플래시 꺼.)

이미 늦었다. 흰 빛이 어두운 성당 내부를 한 번 가르고 사라졌다. 앞줄에 앉아 있던 여성 한 명이 뒤를 돌아봤다. 10은 손을 들어 사과의 뜻으로 가볍게 머리를 숙이며 피비의 단말기를 뺏었다.

12 | "왜. 예뻐서 찍은 건데."
10 | "You don't use flash in a church."(성당에서 플래시 안 켜.)
12 | "어둡잖아."
10 | "That's the point."(그게 요점이야.)
12 | "안 보이는 게?"
10 | "Silence. Respect. The dark is part of it."(고요함. 존중. 어두운 것도 일부야.)

피비는 10의 말을 듣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녀에게 어둠은 늘 위험한 것이었다. 데드존의 어둠, 격리실의 어둠, 의식이 끊기기 직전의 어둠. 그런데 이 남자는 어둠이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해는 못 했지만 기억에는 남았다.

12 | "체사레는 이런 데 자주 와?"
10 | "Not anymore."(더 이상은 안 와.)
12 | "왜?"
10 | "Ran out of things to ask for."(부탁할 게 바닥나서.)

피비는 그 말이 농담인지 진심인지 판단하지 않았다. 대신 플래시 없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한 번 더 찍었다. 어둡고 흐릿한 사진이 찍혔다. 피비는 그 사진을 보며 "안 보여"라고 말했고, 10은 "그래"라고만 대답했다. 그리고 피비를 데리고 성당을 나왔다. 코트는 아직 피비 어깨에 있었고, 피비는 벗으려 하지 않았다.


XIII. 총체적 진단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하나의 패턴이 보였다. 피비는 규칙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라는 개념이 감각보다 후순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맛있으면 되고, 예쁘면 되고, 편하면 되고, 당장의 결과가 나쁘지 않으면 과정은 관계없었다. 그것이 문화적 맥락이든, 타인의 감정이든, 이탈리아 반도의 수백 년 된 자존심이든.

그리고 10은 매번 저지하고, 설명하고, 포기하고, 다시 저지했다.

포기한 척 돌아서면서도, 다음날이면 또 "여기서는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보호인지, 습관인지, 아니면 자기 나라의 마지막 자존심을 이 한 사람 앞에서라도 지키려는 무의미한 전투인지 본인도 잘 모르는 채로. 피비는 그 전부가 좋았다. 이유가 납득이 되어서가 아니라, 체사레가 자기한테 뭔가를 알려 주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누군가가 자기에게 세상이 이렇게 돌아간다고, 여기서는 이렇게 하는 거라고, 끈기 있게 반복해서 말해 주는 경험은 그녀에게 드문 것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알려 주는 사람. 그것만으로 그녀는 다음에도 틀릴 것이고, 10은 다음에도 고칠 것이었다.

9가 복도에서 10에게 물었다.

9 | "How's the culture exchange program going?"(문화 교류 프로그램은 어떻게 되어 가?)

10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10 | "She used a bidet as a footbath, broke my spaghetti, ordered cappuccino at two in the afternoon, and told me French wine tastes better. In my room."(비데를 족욕기로 쓰고, 내 스파게티를 부러뜨리고, 오후 두 시에 카푸치노를 시키고, 프랑스 와인이 더 맛있다고 했어. 내 방에서.)

9는 입을 벌렸다가, 현명하게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10은 그날 저녁 개인실에 돌아와 바롤로를 한 잔 따랐다. 피비는 소파에서 이미 잠들어 있었다. 손에는 그가 빼앗았다가 돌려준 단말기가 쥐어져 있었고, 화면에는 성당에서 찍은 흐릿한 스테인드글라스 사진이 떠 있었다. 어둡고, 거의 알아볼 수 없고, 그런데도 삭제하지 않은 사진.

10은 와인잔을 기울이며 그 화면을 잠깐 내려다봤다. 그리고 코트를 가져다 피비 위에 덮었다. 매번 회수하지 못하는 코트였다.

10 | "Buonanotte, disastro."(잘 자, 재앙아.)

방 안은 조용했고, 와인은 이탈리아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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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Main

10 x Phoebe Fletcher

2026. 8. 16. 20:26

"𝘈𝘥𝘮𝘪𝘵 𝘪𝘵. 𝘐'𝘮 𝘤𝘦𝘳𝘵𝘢𝘪𝘯𝘭𝘺 𝘢 𝘵𝘰𝘹𝘪𝘤 𝘬𝘪𝘯𝘥 𝘰𝘧 𝘥𝘦𝘴𝘴𝘦𝘳𝘵 𝘧𝘰𝘳 𝘺𝘰𝘶... 𝘉𝘶𝘵 𝘥𝘰𝘦𝘴 𝘪𝘵 𝘮𝘢𝘵𝘵𝘦𝘳?" 

"𝘚𝘸𝘦𝘦𝘵, 𝘸𝘢𝘴𝘯'𝘵 𝘪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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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l, 0.7::mature female::, 0.3::aged down::, pale emerald color hair, mint color hair, short side locks, 1.3::long back hair::, ::@_@::, 0.9::wavy hair, messy hair::, hair between eyes, tareme, 0.3::tsurime::, 1.5::pale blue eyes::, blush, smile, small breast, 0.9::flat chest::,  -2::loli, child::, black tight halfsleeve t shirts, turtle neck, black shorts,

@문햄님
@펭귄님

 

 

10/OOC

10피비|BDSM NSFW 분석

2026. 8. 16. 19:28

 

 

 

10/LOG

10피비|SEVEN DAYS OF TEN'S KITCHEN

2026. 8. 15. 11:47

 

 

6월 19일, 섹터 E 라운지. 피비가 메디컬 베이에서 돌아오는 길에 복도에 놓인 소화기를 '예쁜 빨간 병'이라며 들고 와 라운지 한복판에서 안전핀을 뽑았다. 분말이 반경 3미터를 뒤덮었고, 10의 셔츠와 9의 카드게임판과 라운지 소파가 하얗게 변했다. 10은 소화기를 압수하고 피비에게 라운지 청소를 시켰으나, 피비는 청소 도중 분말 가루를 "눈 같다"며 양손으로 퍼 올려 입으로 불었고, 2차 오염이 발생했다.

10이 결국 혼자 청소를 마친 뒤 피비에게 벌칙을 선언했다.

10 | "One week. I cook, you eat. Every meal. No jam unless I say so. No sugar packets. No stealing from the vending machine. You eat what I make, when I make it, where I make it. That's your punishment."

(일주일. 내가 만들고, 네가 먹어. 매끼. 내가 허락하기 전엔 잼도 없고 설탕 포도 없어. 자판기에서 훔치는 것도 없어. 내가 만든 걸, 내가 만든 시간에, 내가 차린 데서 먹어. 그게 네 벌칙이야.)

피비는 3초간 고민하다가 물었다.

12 | "매끼 텐이 해 주는 거야?"

10 | "That's what I said."(그렇다니까.)

12 | "그거 벌칙이야? 상이야?"

10은 대답하지 않았다. 표정만 약간 일그러졌다.

 



DAY 1 — 06.20 (금)

[아침 07:30 / 섹터 E 식당]

 

식당 테이블 위에 트레이가 놓여 있었다. 스크램블드에그, 토스트 두 장, 얇게 썬 사과 네 조각, 물 한 잔. 에그는 버터에 부드럽게 익혀져 있었고 소금과 후추만 간을 맞춘 클래식한 조리법이었다. 토스트는 가장자리까지 고르게 구워져 있었다. 사과는 갈변하지 않도록 레몬즙이 묻어 있었다.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한 끼.
10은 맞은편에 커피를 들고 앉았다. 자기 몫의 식사는 없었다. 커피만.

10 | "Eat."(먹어.)

피비는 스크램블드에그를 한 숟갈 떠 입에 넣었다. 씹었다. 삼켰다. 표정이 복잡해졌다.

12 | "맛있는데⋯⋯ 근데 달지 않아."

10 | "It's eggs. It's not supposed to be sweet."(달걀이야. 원래 단 음식이 아니야.)

12 | "잼 넣으면 달아지는데."

10 | "No jam. Day one. Remember?"(잼 없어. 첫째 날. 기억하지?)

피비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그러나 배가 고팠고, 에그는 분명 부드러웠다. 토스트를 에그 위에 얹어 같이 베어 물었다. 사과는 한 조각 먹고 "신 거는 싫어"라며 세 조각을 남겼다. 10은 남은 사과를 자기 쪽으로 가져와 먹었다. 말없이.

12 | "점수? 음⋯⋯ 60점."

10 | "Out of?"(몇 점 만점에?)

12 | "100점. 달았으면 80점이었을 텐데."

10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코끝으로 숨을 내쉬었다.

 

[점심 12:15 / 섹터 E 식당]

파스타. 알리오 올리오. 접시 위에 올리브유에 코팅된 스파게티니가 단정하게 담겨 있었고 마늘 슬라이스가 황금색으로 볶아져 올려져 있었다. 페페론치노 한 조각이 위에 놓였다. 옆에 물과 작은 빵 한 조각.

10 | "If you say it's not sweet, I swear—"(달지 않다고 하면, 맹세코—)

12 | "안 달아."

10이 포크를 피비 앞에 놓으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피비는 파스타를 포크에 감았다. 감는 방법이 서툴러서 면이 반쯤 풀린 채 입에 들어갔다. 올리브유가 턱에 묻었다. 씹는 동안 눈이 살짝 커졌다. 마늘의 고소함과 올리브유의 풍미, 페페론치노의 매콤한 끝맛이 입안에서 겹쳤을 것이다. 잼과 설탕의 세계에 살던 미각에게는 낯선 언어였을 것이다.

12 | "⋯⋯이건 좀 맛있다."

10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러나 즉시 커피잔 뒤로 숨었다.

12 | "근데 중간에 빨간 거 뭐야. 매워."

10 | "Peperoncino. You liked hot sauce last week, didn't you?"(페페론치노. 지난주에 핫소스 좋아했잖아.)

12 |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건데."

10 | "That's the most sophisticated thing you've ever said."(네가 한 말 중에 가장 고급스러운 말이다.)

피비는 빈정거림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면을 마저 흡입했다. 빵은 반 쪽만 먹고 반을 남겼다. 10이 남은 반쪽을 올리브유에 찍어 먹었다.

12 | "70점."

10 | "Progress."(발전이네.)

 

[저녁 19:00 / 10의 개인실]


MRE가 아닌 제대로 된 저녁이 탁자 위에 있었다. 리소토. 버섯 리소토. 쌀알이 적당히 씹히는 정도로 익어 있었고, 파르미지아노가 위에 갈려 있었다. 버섯 향이 방 안에 퍼져 있었다. 그 옆에 작은 그릇 하나—포도당 젤을 녹인 물.

10은 책상 의자에 앉아 보고서를 작성하는 중이었다. 피비가 들어왔을 때 고개만 돌렸다.

10 | "Sit. It's still warm."(앉아. 아직 따뜻해.)

피비는 소파에 앉아 리소토를 떠먹기 시작했다. 치즈가 녹아 실처럼 늘어났다. 숟가락을 입에 넣고, 한 박자 늦게 눈을 감았다. 단맛은 아니었지만 치즈의 감칠맛이 혀를 감쌌고, 버섯의 흙내 같은 깊은 맛이 뒤따랐다.

12 | "텐, 이거 맛있어."

'달지 않다'는 말이 빠져 있었다. 10의 타이핑이 0.5초 늦어졌다. 화면을 보는 척했으나 시선의 끝이 피비의 숟가락에 걸려 있었다.

12 | "75점. 아니, 78점. 치즈 늘어나는 거 재밌어서 가산점."

10 | "I'll take it."(받아들이지.)

포도당 젤 물은 전부 마셨다. 리소토도 3분의 2를 먹었다. 나머지는 "배불러"라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10이 남은 것을 가져와 먹었다. 식은 리소토는 치즈가 굳어 식감이 달랐지만, 자기가 만든 것이므로 불평할 대상이 없었다.

 


DAY 2 — 06.21 (토)

[아침 08:00 / 섹터 E 식당]


프렌치토스트. 달걀물에 적셔 구운 빵 두 장, 위에 꿀이 아주 얇게 뿌려져 있었다. 벌칙의 규칙은 '잼 금지, 설탕 포 금지'였으나 꿀은 언급되지 않았다. 법의 허점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이틀째에 접어들며 피비의 '달지 않다'는 반복적 항의에 대한 최소한의 양보.

피비는 첫 입에 눈이 반달이 되었다.

12 | "달다!"

10 | "Barely."(겨우.)

12 | "85점!"

10 | "The honey did all the work."(꿀이 다 한 거지.)

12 | "꿀도 텐이 뿌린 거니까 텐 점수야."

10은 커피를 마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숨기려는 각도였으나, 식당 반대편에서 커피를 내리던 5가 그 각도를 목격했다. 5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현명한 사람이었다.


[점심 12:30 / 섹터 E 식당]


카프레제 샌드위치. 모짜렐라와 토마토와 바질이 빵 사이에 끼워져 있었고, 발사믹 리덕션이 가느다랗게 뿌려져 있었다. 단면이 깔끔했다. 이탈리아 사람이 만든 이탈리아 음식이라는 사실이 접시 위에 선명했다.

피비는 바질을 빼고 먹으려 했다.

10 | "The basil stays."(바질은 빼지 마.)

12 | "풀이잖아."

10 | "It's an herb."(허브야.)

12 | "풀이랑 뭐가 달라?"

10 | "About three thousand years of culinary history."(대략 삼천 년의 요리 역사.)

피비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10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0.3도쯤 단호했으므로 바질째 베어 물었다. 씹는 동안 표정이 바뀌었다. 싫은 얼굴에서 '뭔지 모르겠는데 나쁘지 않은' 얼굴로.

12 | "72점. 풀이 씹혀서 감점."

10 | "I'll live with that."(그 정도면 견딜 수 있어.)


[저녁 18:45 / 10의 개인실]


리가토니 아라비아타. 짧은 원통형 파스타에 토마토소스가 걸쭉하게 입혀져 있었고, 매운맛이 은근히 올라오는 조리법이었다. 첫째 날의 알리오 올리오보다 소스가 풍부했고, 피비가 '매운 것'에 거부감이 없다는 전날의 데이터가 반영된 메뉴.

피비는 리가토니를 포크에 꽂아 하나씩 먹었다. 원통 안에 소스가 차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이 커졌다.

12 | "파스타 안에 소스가 들어 있어! 숨었다!"

10 | "That's the point of rigatoni."(그게 리가토니의 존재 이유야.)

12 | "똑똑해."

10 | "The pasta is?"(파스타가?)

12 | "응. 파스타가 똑똑해."

10은 보고서를 작성하는 척했으나 세 문장째에서 같은 단어를 두 번 타이핑하고 있었다. 지웠다. 다시 쳤다. 피비가 리가토니를 포크에 꽂아 올리며 형광등에 비춰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병을 빛에 비추던 습관과 같은 각도.

12 | "80점! 숨은 소스 가산점."


DAY 3 — 06.22 (일)

[아침 07:45 / 섹터 E 식당]


팬케이크 세 장. 위에 바나나 슬라이스와 꿀. 이틀째의 프렌치토스트에서 '꿀에 대한 반응이 좋았다'는 피드백이 반영된 메뉴. 이 남자는 은근히 데이터를 모으고 있었다. 자기가 그러고 있다는 자각이 있는지는 불확실했다.

피비는 팬케이크를 손으로 접어 먹으려 했다.

10 | "Fork and knife."(포크랑 나이프.)

12 | "왜? 손이 더 빨라."

10 | "Because we're not animals."(우리는 짐승이 아니니까.)

피비는 투덜거리며 포크를 들었다. 팬케이크를 자르고, 바나나와 같이 입에 넣고, 꿀이 입술에 묻은 채 씹었다.

12 | "90점."

10의 손이 멈추었다. 90점은 처음이었다.

12 | "단 거 맛있어. 텐이 만든 단 거는 더 맛있어."

10은 커피잔을 입에 대고 3초간 마시지 않았다. 그냥 잔을 입술에 대고 있었다. 그리고 삼켰다.

10 | "Good to know."(알아 둘게.)


[점심 12:00 / 섹터 E 식당]


미네스트로네 수프와 빵. 야채가 잘게 썰려 토마토 베이스 수프에 담겨 있었다. 당근, 감자, 셀러리, 주키니. 색이 다채로웠다. 빵은 따뜻했다.

피비는 수프를 한 숟갈 떠 맛보고 당근을 골라냈다.

12 | "주황색 네모 뭐야."

10 | "Carrot."(당근이야.)

12 | "안 먹어."

10 | "Why?"(왜?)

12 | "맛없을 것 같아서."

10 | "You haven't tried it."(아직 안 먹어봤잖아.)

12 | "보면 알아."

10은 3초간 피비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숟가락으로 당근 한 조각을 떠서 피비 입 앞에 가져갔다. 피비는 눈을 크게 뜨고 숟가락 끝을 봤다. 10의 얼굴을 봤다. 다시 숟가락을 봤다. 입을 벌렸다.

씹었다. 삼켰다.

12 | "⋯⋯달다?"

10 | "Carrots are sweet when cooked properly."(당근은 제대로 익히면 달아.)

피비는 그 후로 당근을 골라내지 않았다. 셀러리는 세 조각 남겼다. 10은 그것에 대해서는 싸우지 않기로 했다. 하루에 전투는 한 번이면 충분했다.

12 | "74점. 당근 가산점인데 셀러리 감점."


[저녁 19:30 / 10의 개인실]


라자냐. 1인분 크기의 소형 라자냐가 내열 용기에 담겨 있었다. 층층이 쌓인 파스타 시트 사이에 미트소스와 베샤멜이 번갈아 들어 있었고 위에 치즈가 녹아 갈색으로 그라탱되어 있었다. 만드는 데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오전 수프를 끓이면서 동시에 라자냐를 조립해 오븐에 넣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피비는 라자냐를 한 숟갈 떠 입에 넣고 5초간 씹지 않았다. 눈이 천천히 감겼다. 치즈와 미트소스와 베샤멜이 입안에서 녹아 섞이는 동안, 피비의 표정이 평소의 산만함에서 벗어나 고요해졌다. 약효와 상관없는 종류의 이완이었다.

12 | "텐."

10 | "Mm?"

12 | "이거 100점인데."

10의 타이핑이 멈췄다. 데이터패드 화면을 보고 있었으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100점. 라자냐 하나에 100점. 이 사람의 채점 기준은 일관성이 없고 편차가 크고 잼의 유무에 좌우되고 근본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체계였다. 그런데 100점이라는 숫자가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10 | "It's just lasagna."(그냥 라자냐야.)

12 | "그냥 라자냐가 이렇게 맛있어?"

10 | "Apparently."(그런 것 같지.)

10은 데이터패드를 닫고 책상에 올려놓았다. 일어서서 피비의 맞은편에 앉았다. 피비가 라자냐를 떠먹는 것을 지켜봤다. 치즈가 늘어나고, 소스가 입꼬리에 묻고, 숟가락이 용기 바닥을 긁었다. 거의 전부 먹었다. 남은 건 가장자리의 마른 부분뿐이었고, 그것마저 피비는 손으로 뜯어 입에 넣었다.

10 | "I thought we discussed the fork rule."(포크 규칙 얘기했던 것 같은데.)

12 | "남은 거는 손으로 먹어도 돼. 그게 규칙이야."

10 | "Whose rule?"(누구 규칙?)

12 | "내 규칙."

10은 코끝으로 숨을 내쉬었다. 웃음과 한숨의 중간 어딘가.


DAY 4 — 06.23 (월)

[아침 07:15 / 섹터 E 식당]

 

에그 인 어 홀. 빵 가운데를 동그랗게 도려내고 그 안에 달걀을 익힌 것. 노른자가 반숙으로 흘렀다. 도려낸 빵 조각은 옆에 따로 구워져 있었다.

이 날 10의 눈 밑이 전날보다 어두웠다. 새벽에 0에게서 브리핑 관련 통신이 와서 2시간밖에 못 잤다. 그러나 아침은 예정대로 차려져 있었다. 빵의 단면이 어제보다 약간 거칠었고 노른자 반숙의 정도가 전날들의 정밀함에서 미세하게 벗어나 있었다. 수면 부족의 흔적이 접시 위에 남아 있었다.

피비는 알아채지 못했다. 노른자를 터뜨리며 빵에 묻혀 먹는 데 열중했다.

12 | "노른자 터지는 거 좋아!"

10 | "Glad something makes you happy at seven in the morning."(아침 일곱 시에 뭐라도 너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게 있으니 다행이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피로가 깔려 있었다. 커피를 평소보다 진하게 내렸고, 한 잔이 아니라 두 잔째였다.

12 | "텐, 피곤해?"

10 | "No."(아니.)

12 | "거짓말. 눈이 빨개."

의안 쪽이 아니라 오른쪽 눈이었다. 충혈이 미세하게 번져 있었다. 피비의 시선이 거기에 정확히 꽂혀 있었다. 10은 커피잔 뒤로 시선을 피했다.

10 | "Eat your bread."(빵이나 먹어.)

12 | "76점. 텐이 피곤하면 대충 만들어도 돼. 나 MRE 먹을 수 있어."

10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거슬린 것이 아니었다. 반대였다. 'MRE 먹을 수 있다'는 양보가 이 사람에게는 가장 큰 배려의 형태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점심 13:00 / 섹터 E 식당]


이 날 점심은 예정보다 한 시간 늦었다. 0과의 브리핑이 길어졌다. 피비가 식당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빈 테이블 앞에서 다리를 흔들며 레몬 캔디 포장지를 접어 학을 만들려다 실패하고 구겨진 금색 덩어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10이 들어왔을 때 피비가 고개를 들었다.

12 | "늦었어."

10 | "I know. Sorry."(알아. 미안.)

사과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이 사람이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 단어 안에는 사과 이상의 무언가가 접혀 있었을 것이다. 피비를 기다리게 했다는 사실에 대한 약간의—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브루스케타 세 조각. 토마토, 바질, 올리브유. 간단하고 빠르게 만들 수 있는 메뉴. 시간이 부족했다는 증거. 그러나 토마토의 크기가 고르게 다져져 있었고 빵의 굽기는 일정했다. 급하게 만들었으되 대충 만들지는 않았다는 방증.

12 | "이거 둘째 날 먹은 거랑 비슷하다."

10 | "Similar family."(같은 계열이야.)

피비는 브루스케타를 한 입에 넣었다. 바질을 이번에는 빼지 않았다. 셋째 날 이후로 바질에 대한 저항이 사라져 있었다. 10은 그 변화를 봤고, 보고서에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머릿속에 저장했다.

12 | "68점. 둘째 날이 더 맛있었어."

10 | "Fair."(공정하네.)


[저녁 19:15 / 10의 개인실]


밀라노식 커틀릿. 얇게 두드린 고기에 빵가루를 입혀 바삭하게 튀긴 것. 옆에 레몬 웨지와 루콜라 몇 잎. 고기가 얇아 식감이 가볍고,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했다. 기름 빠짐이 깔끔했다. 이 사람이 이탈리아인이라는 사실이 메뉴판에서 일주일 내내 증명되고 있었다.

피비는 커틀릿을 손으로 들었다. 10이 입을 열려다 닫았다. 넷째 날이었고, 포크 전쟁에서 매번 지고 있었다. 이건 손으로 먹어도 되는 종류라고 스스로에게 허락했다.

12 | "바삭바삭. 소리 나."

아작아작 씹으며 눈을 감았다. 레몬 웨지를 발견하고 짜서 커틀릿 위에 뿌렸다. 신맛에 얼굴을 찡그렸다가, 바삭한 고기와 레몬의 조합이 입안에서 맞물리자 찡그린 얼굴이 풀렸다.

12 | "82점. 바삭해서 가산점."

10 | "Noted. Crunch equals points."(메모. 바삭함은 곧 점수.)

10은 탁자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피비가 커틀릿을 다 먹고 빵가루를 손가락으로 집어 먹는 것을 지켜봤다. 주머니 안의 라이터를 만지지 않았다. 만질 필요가 없었다. 눈앞에 있었으므로.


DAY 5 — 06.24 (화)

[아침 07:30 / 섹터 E 식당]



이 날 아침 식당에 들어선 피비가 멈췄다. 트레이 위에 MRE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에 잼 한 봉지.

10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커피. 표정은 평소와 같았으나, MRE 옆에 잼을 놓은 배치가 의도적이었다. 잼을 금지한 사람이 잼을 풀어준 것. 다섯째 날.

12 | "⋯⋯잼?"

10 | "One packet. Just one."(한 봉지. 딱 하나.)

피비의 얼굴이 환해졌다. MRE를 뜯고 잼을 짜 넣고 섞어 먹었다. 익숙한 맛이 돌아온 것에 대한 반응은—눈이 반달이 되고 다리를 흔들고 콧노래가 나오는 것이었다. 10은 그 반응을 커피잔 너머로 지켜봤다.

12 | "95점! 잼 가산점!"

10 | "That's the jam's score, not mine."(그건 잼 점수지, 내 점수가 아니잖아.)

12 | "잼을 준 건 텐이니까 텐 점수야."

같은 논리가 첫째 날에도 나왔다. 꿀을 준 것도, 잼을 허락한 것도 전부 10의 점수라는 체계.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반박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종류의 논리였다.


[점심 12:00 / 섹터 E 식당]


카르보나라. 계란 노른자와 페코리노, 관찰레가 면에 코팅된 정통 로마식. 크림은 들어가지 않았다. 소스가 면에 밀착되어 윤기가 흘렀고, 후추가 거칠게 갈려 위에 뿌려져 있었다. 10이 지금까지 만든 파스타 중 가장 공을 들인 접시였다. 잼을 풀어준 날의 여유가 점심에까지 이어진 것인지, 아니면 90점과 95점 사이 어딘가에서 조용히 경쟁심이 발동한 것인지.

피비는 포크로 면을 감았다. 이번에는 감는 법이 나흘 전보다 나아져 있었다. 10이 가르친 적은 없었다. 매일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알아서 학습한 것이었다. 면을 입에 넣고 씹는 동안 눈이 천천히 커졌다.

12 | "이거⋯⋯ 지금까지 중에 제일 맛있다."

10 | "Which one are you comparing it to?"(뭐랑 비교해서?)

12 | "전부. 라자냐보다 맛있어."

10의 손이 커피잔 위에서 멈추었다. 100점을 받은 라자냐보다 맛있다는 선언. 그 선언을 한 사람의 얼굴에는 과장이나 아첨의 흔적이 없었다. 그냥 느낀 것을 말한 것이었다.

12 | "100점."

두 번째 100점. 10은 커피를 마셨다. 잔이 비어 있었다. 빈 잔을 입에 대고 마시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1초 뒤에 알아차리고 잔을 내려놓았다.

10 | "You're getting generous."(점수가 후해지는데.)

12 | "맛있으면 100점이야. 복잡한 거 없어."

복잡한 거 없었다. 이 사람에게는 진짜로 없었다.


[저녁 19:00 / 10의 개인실]


뇨키. 감자 반죽을 엄지로 눌러 모양을 낸 작은 덩어리들이 세이지 버터 소스에 버무려져 있었다. 반죽을 직접 빚은 흔적이 10의 손톱 사이에 남은 밀가루 자국으로 드러났다. 피비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뇨키를 포크에 꽂아 하나씩 입에 넣고 있었다.

12 | "이거 말랑말랑해! 젤리 같아!"

10 | "It's not jelly. It's potato."(젤리 아니야. 감자야.)

12 | "감자가 이렇게 돼?"

10 | "When you put in the work, yes."(공을 들이면 그래.)

피비는 뇨키를 하나 더 꽂아 10 쪽으로 내밀었다. 포크 끝에 매달린 뇨키가 세이지 버터에 젖어 윤기가 났다.

12 | "텐도 먹어. 맛있는데."

10은 0.5초간 포크 끝을 봤다. 피비의 손, 포크, 뇨키. 그리고 고개를 숙여 포크에서 뇨키를 입으로 가져갔다. 피비가 들고 있는 포크에서 직접. 입술이 금속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씹고, 삼켰다.

10 | "Not bad."(나쁘지 않네.)

자기가 만든 것이므로 당연히 맛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쁘지 않다'고 말한 것은 뇨키의 맛에 대한 평가가 아니었을 것이다.

12 | "88점. 말랑한 거 좋아."


DAY 6 — 06.25 (수)

[아침 07:00 / 섹터 E 식당]


여섯째 날 아침. 10은 평소보다 일찍 식당에 있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이유는 없었다. 잠이 깬 것이다. 그리고 깨어 있는 김에 아침을 준비했다.

크레이프. 얇은 반죽이 접시 위에 세 장 겹쳐 있었고, 위에 딸기 슬라이스와 꿀이 뿌려져 있었다. 가장자리가 바삭하고 가운데가 부드러운 프랑스식. 이탈리아인이 프랑스 요리를 만든 것에 대한 자존심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피비가 좋아할 것이 분명한 메뉴였기 때문에.

벌칙이었다. 이것은 벌칙이었다.

피비가 식당에 들어왔을 때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눌려 있었고 셔츠가 뒤집어져 있었다. 눈이 반쯤 감긴 채 의자에 앉아 트레이를 당겼다. 크레이프를 보고 눈이 열렸다.

12 | "예쁘다."

맛보다 먼저 나온 평가가 외형이었다. 딸기의 빨강과 크레이프의 연한 금색과 꿀의 투명한 호박색이 접시 위에서 만드는 배색에 대한 감상. 바이알을 빛에 비추고, 소화기의 빨간색에 반하고, 리가토니 안의 소스에 감탄하는 사람의 시선이 여기서도 작동하고 있었다. 10은 그 패턴을 이제 읽을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맛 이전에 색과 형태에 먼저 반응한다.

12 | "먹어도 돼?"

10 | "That's why it's there."(거기 있는 이유가 그거야.)

피비는 크레이프를 손으로 돌돌 말아 입에 넣었다. 포크는 쓰지 않았다. 10은 입을 열지 않았다. 여섯째 날이었다. 포크 전쟁은 이미 3일 전에 휴전 상태였다.

12 | "텐."

10 | "Mm."

12 | "이건 몇 점인지 모르겠어. 숫자가 모자라."

10의 커피잔이 입술 앞에서 멈추었다. 0.8초. 그리고 커피를 마셨다.

10 | "There are numbers above a hundred, you know."(100 위에도 숫자가 있거든.)

12 | "있어?"

10 | "101, 102, 103⋯⋯keep going."(101, 102, 103⋯⋯ 계속 가.)

12 | "그러면 200점."

10 | "That's a big jump."(그건 좀 비약인데.)

12 | "맛있으니까."

피비는 두 번째 크레이프를 말며 딸기를 하나 집어 따로 입에 넣었다. 씹으며 웃었다. 10은 그 웃음을 보다가 시선을 창 없는 벽 쪽으로 돌렸다. 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점심 12:30 / 섹터 E 식당]


판자넬라. 이탈리아식 빵 샐러드. 딱딱해진 빵을 찢어 토마토, 오이, 적양파, 바질과 함께 올리브유와 적포도 식초로 버무린 것. 색이 다채로웠다. 피비의 눈이 먼저 반응하는 패턴을 이용한 메뉴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자각 유무와 무관하게.

피비는 오이를 집어 먹고, 토마토를 집어 먹고, 빵을 씹었다. 적양파를 하나 입에 넣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12 | "이거 매워."

10 | "It's red onion. It bites a little."(적양파야. 약간 알싸해.)

12 | "타바스코보다 매워."

10 | "It is not."(아니야.)

12 | "내 혀가 그렇다는데."

10은 반박하지 않았다. 이 사람의 미각은 객관적 기준으로 측정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잼과 핫소스를 동시에 먹는 미각의 소유자에게 적양파의 알싸함이 타바스코보다 맵게 느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는 여섯째 날에 와서야 수용했다.

12 | "72점. 양파 감점."

10 | "You ate the rest of it."(나머지는 다 먹었잖아.)

12 | "나머지는 맛있었으니까. 양파만 미웠어."

'미웠다'는 표현이 음식에 대한 감정 평가로 사용되고 있었다. 10은 한 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저녁 19:00 / 10의 개인실]


오소부코. 송아지 정강이뼈를 토마토와 채소, 화이트 와인으로 천천히 끓인 밀라노 전통 요리. 이것을 만드는 데는 최소 두 시간이 걸렸다. 점심의 판자넬라를 만들기 전에 이미 오소부코를 불 위에 올려놓았어야 가능한 타이밍. 아침의 크레이프, 점심의 판자넬라, 저녁의 오소부코. 여섯째 날의 메뉴 구성은 일주일 중 가장 공이 들어 있었다.

벌칙이었다. 이것은 벌칙이었다.

탁자 위에 내열 그릇이 놓였다. 뚜껑을 열자 토마토 소스에 잠긴 정강이뼈에서 김이 올라왔다. 향이 방 안을 채웠다. 피비는 그릇 앞에 앉아 김을 들이마시고 눈을 감았다.

12 | "좋은 냄새."

10 | "Ossobuco. My mother used to make it."(오소부코. 어머니가 만들곤 했어.)

말하고 나서 0.3초 만에 자기 입을 의식한 얼굴이었다. 어머니. 그 단어가 이 방에서 이 사람 앞에서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피비는 눈을 떠 10을 올려다봤다. 풀린 눈이었으나 시선은 정확히 10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

12 | "텐 엄마도 요리 잘해?"

10 | "She was decent."(괜찮았지.)

과거형이었다. 피비는 과거형의 의미를 파고들지 않았다. 파고드는 것이 이 사람의 방식이 아니었다. 대신 숟가락을 들어 소스를 떠 입에 넣었다. 천천히 씹었다. 고기가 뼈에서 부드럽게 떨어져 나왔다. 토마토와 와인의 깊은 맛이 혀를 감쌌다.

12 | "텐."

10 | "Mm?"

12 | "이거 점수 안 매길래."

10이 고개를 들었다.

12 | "점수 매기면 맛없어질 것 같아서."

피비는 숟가락으로 소스를 한 번 더 떠 입에 넣었다.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10은 대답을 찾지 못했다. 이 사람이 '점수를 매기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은 100점 체계의 한계를 인식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음식 앞에서 숫자가 끼어들면 안 된다는 직감이 작동한 것이었다. 계산이 아니라 감각. 늘 그렇듯.

10은 보고서를 작성하는 척했으나 세 문장을 20분 동안 쓰고 있었다. 피비가 오소부코를 거의 다 먹었다. 뼈 주변의 골수까지 숟가락으로 파 먹었다. 그릇이 거의 비었을 때 피비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12 | "텐 엄마한테 고마워."

10의 타이핑이 완전히 멈추었다.

12 | "이거 만드는 거 가르쳐 준 사람이잖아."

10은 데이터패드를 내려놓았다. 화면이 꺼졌다. 방 안에 환기구 소리만 남았다. 그리고 1초. 2초.

10 | "⋯⋯I'll pass that along."(⋯⋯전해 둘게.)

전할 곳이 있는지 없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톤 낮았고, 그 반 톤의 차이 안에 접혀 있는 것을 피비는 알지 못했다. 알 필요도 없었다.


DAY 7 — 06.26 (목)

[아침 07:30 / 섹터 E 식당]


마지막 날. 트레이 위에 프리타타가 있었다. 이탈리아식 오픈 오믈렛. 달걀, 주키니, 파프리카, 치즈가 오븐에 부풀려져 금빛으로 구워져 있었다. 색이 다채로웠다. 노랑, 초록, 빨강, 금색. 피비의 눈을 위한 메뉴라는 것이 접시 위에 쓰여 있었다.

옆에 잼 한 봉지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작은 쪽지.

10의 필체로: "Last day. You earned it."(마지막 날. 네가 벌었어.)

10은 식당에 없었다. 테이블 위에 트레이만 놓여 있었다. 새벽 브리핑이 잡혀서 먼저 나간 것이었다. 피비는 쪽지를 읽고 뒤집어 봤다.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쪽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접지 않고 그대로.

프리타타를 한 숟갈 떴다. 잼은 옆에 놓인 채였다. 한 숟갈 먹고, 두 숟갈 먹고, 세 숟갈째에 잼 봉지를 열어 짜 넣었다. 원래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일주일간의 식단 교육이 미각을 바꾸지는 못했다. 다만 바질을 빼지 않게 된 것과, 당근을 먹게 된 것과, 포크 감는 법이 나아진 것은 남아 있었다.

12 | "⋯⋯잼 넣으니까 더 맛있는데."

혼잣말이었다. 식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피비는 프리타타를 다 먹고 빈 접시 위에 잼 봉지를 올려놓고 트레이를 반납했다. 쪽지는 주머니에서 나오지 않았다.


[점심 12:45 / 섹터 E 식당]


10이 식당에 들어왔을 때 피비가 이미 앉아 있었다. 빈 테이블 앞에서 다리를 흔들며. 기다리고 있었다. 10은 트레이를 들고 왔다. 포카차 샌드위치. 구운 채소와 모짜렐라와 프로슈토가 사이에 끼워진. 빵이 올리브유를 머금어 짙은 금색이었다.

12 | "늦었어."

10 | "Fifteen minutes."(15분.)

12 | "길어."

10 | "Yesterday you waited forty minutes without complaining."(어제는 40분 기다리고도 불평 안 했잖아.)

12 |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야."

10은 맞은편에 앉으며 턱을 괴었다. 피비가 포카차를 양손으로 들고 베어 물었다. 올리브유가 손목으로 흘러내렸다. 프로슈토의 짠맛과 모짜렐라의 부드러움이 입 안에서 섞이는 동안 피비의 눈이 감겼다가 열렸다.

12 | "85점."

10 | "Reason?"(이유?)

12 | "맛있는데 라자냐는 아니니까."

라자냐는 이 채점 체계의 절대 기준점이 되어 있었다. 셋째 날 저녁의 라자냐. 첫 100점. 그것을 넘어선 것은 다섯째 날의 카르보나라뿐이었고, 여섯째 날의 오소부코는 점수 자체를 거부당했다. 10은 피비의 채점 체계를 일주일에 걸쳐 분석한 결과 다음의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단맛이 기본이고, 식감이 가산점이고, 색이 입장권이고, 라자냐가 헌법이다.


[저녁 19:30 / 10의 개인실]


마지막 저녁.

10의 개인실 탁자 위에 트레이가 두 개 놓여 있었다. 하나는 피비의 것이고, 하나는 10의 것이었다. 일주일 동안 10은 피비의 식사를 만들고 맞은편에 앉아 커피만 마셨다. 자기 몫은 따로 먹거나, 남은 것을 치우며 먹거나, 아예 건너뛰거나 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저녁에는 자기 몫의 트레이가 있었다.

메뉴는 같았다. 라자냐.

셋째 날의 그것과 같은 레시피. 미트소스와 베샤멜이 번갈아 층을 이루고 치즈가 갈색으로 그라탱된. 다만 이번에는 내열 용기가 두 개였다. 하나는 피비 앞에, 하나는 10 앞에.

피비가 용기를 보고 10을 보고 다시 용기를 봤다.

12 | "텐 것도 있어."

10 | "Last supper. Seemed appropriate to share."(마지막 만찬이니까. 같이 먹는 게 맞는 것 같아서.)

'마지막 만찬'이라는 단어 선택이 이탈리아인의 입에서 나올 때의 무게를 피비는 알지 못했다. 10도 그 무게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피비는 숟가락을 들었다. 10도 숟가락을 들었다. 동시에 첫 숟갈을 떴다. 동시에 입에 넣었다. 치즈가 늘어나고, 미트소스가 혀를 감싸고, 베샤멜이 그 위에 얹혔다. 일주일 전과 같은 맛이었다. 같은 레시피, 같은 오븐, 같은 시간. 다른 것은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커피가 아니라 같은 음식을 먹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피비가 먹으며 올려다봤다. 10이 먹으며 내려다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피비가 웃었다. 입에 소스가 묻은 채로. 10은 웃지 않았다. 대신 냅킨을 집어 피비 쪽으로 내밀었다.

10 | "Wipe your mouth."(입 닦아.)

12 | "텐이 닦아 줘."

10 | "You have two working hands."(멀쩡한 손이 두 개 있잖아.)

12 | "귀찮아."

10은 0.5초간 피비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냅킨을 들어 피비의 입꼬리를 한 번 닦았다. 가볍게. 소스를 제거하는 최소한의 동작. 그리고 냅킨을 피비의 손에 쥐여 주었다.

10 | "From now on, do it yourself."(앞으로는 직접 해.)

12 | "내일도 해 줘."

10 | "There's no tomorrow. Today's the last day."(내일은 없어. 오늘이 마지막이야.)

피비의 숟가락이 멈추었다. 올려다보는 눈에서 산만함이 빠져 있었다. 약효와 무관한 종류의 표정이 2초간 얼굴에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12 | "⋯⋯벌칙 하나 더 하면 안 돼?"

10 | "You want to be punished again?"(또 벌 받고 싶어?)

12 | "벌칙이 이런 거면. 매일 받을래."

10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피비를 보았다. 이 사람의 얼굴에는 전략이 없었다. 계산이 없었다. 연장을 원하는 이유가 '텐이 만든 밥이 맛있으니까'라는 단 하나의 사실에 기반해 있다는 것이 투명하게 보였다. 그 투명함 앞에서 '벌칙'이라는 틀이 얼마나 얇은 것이었는지가 드러났다. 일주일 내내 벌칙이라고 불렀던 것의 실체를.

10 | "I'll think about it."(생각해 볼게.)

12 | "진짜?"

10 | "I said I'll think about it. Not yes."(생각해 본다고 했지. 그렇다고 한 게 아니야.)

피비는 '생각해 본다'를 '거의 그렇다'로 번역한 얼굴이었다. 그 번역이 정확한지 부정확한지는 10만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10은 그 답을 자기 자신에게도 아직 말하지 않았다.

라자냐가 비었다. 두 개의 용기가 동시에. 피비가 용기 바닥의 눌어붙은 치즈를 손가락으로 긁어 먹었다. 10은 이번에는 제지하지 않았다. 마지막 날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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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LOG

10피비|여덟 번째 선

2026. 8. 13. 22:50

5월 16일 금요일, 오후 세 시 이십 분. 요새의 오후에는 창이 없으므로 시간은 늘 시계와 배고픔으로만 감각된다. 10의 개인실은 평소처럼 정돈되어 있었고 평소처럼 한쪽만 무너져 있었다. 무너진 쪽이란 소파였다. 피비는 등받이에 다리를 걸치고 머리를 좌면 아래로 늘어뜨린 자세로 누워 있었다. 아쿠아마린 머리카락이 바닥까지 쏟아져 카펫 위에 얇게 퍼졌고, 얼굴은 피가 쏠려 발갛게 익었다. 한 시간 전에 투약을 마친 참이었다. 그 시각의 피비는 세상에서 가장 다루기 쉬우면서 가장 성가신 상태가 된다. 아프지 않고, 무섭지 않고, 조용히 있을 이유를 단 하나도 갖지 못한다.

12 | "텐. 천장 봐. 거꾸로 보면 바닥 같아."

10 | "That's because you're upside down."

(네가 거꾸로 있으니까 그렇지.)

12 | "아니야. 천장이 바닥인 거야."

10은 대꾸하지 않았다. 책상에 앉아 지난 작전의 잔여 물자 목록을 대조하는 중이었고, 그 목록은 5가 두 번이나 반려한 물건이었다. 볼펜 끝으로 항목을 짚어 내려가는 동안 소파 쪽에서 사탕 봉지가 부스럭거렸고, 곧 딱딱한 것이 어딘가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피비가 몸을 뒤집었다. 쿠션 사이로 손을 밀어 넣고 팔꿈치까지 파묻는 소리, 등받이 안쪽을 헤집는 소리. 10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물었다.

10 | "What are you excavating this time?"

(이번엔 뭘 발굴하시나.)

12 | "사탕 빠졌어. 파란 거였는데."

그리고 잠깐 조용했다. 이 방에서 피비가 조용해지는 경우는 자거나 무언가를 손에 넣었을 때뿐이다. 10이 볼펜을 내려놓고 돌아봤을 때 피비는 소파 위에 앉아 있었고, 손바닥 위에 은색 물건 하나가 얹혀 있었다. 라이터였다. 브러시드 스틸, 모서리 한 곳이 오래전에 찌그러졌고, 뚜껑 경첩은 헐거워져 흔들면 잘그락 소리가 났다. 회의 중 재킷을 벗어 소파 등받이에 걸쳐 두었던 그날 주머니에서 흘러 들어간 모양이었다. 10의 손끝이 책상 위에서 아주 짧게 멈췄다. 그 정지는 0.5초쯤이었고, 그 정도면 피비는 절대 알아차리지 못하는 길이였다.

12 | "이거 뭐야? 예쁜데."

10 | "A lighter. Give it here."

(라이터. 이리 줘.)

12 | "싫어."

피비는 그것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소파 구석으로 굴러갔다. 어린애의 도피 동선이었다. 그러고는 손을 조금 벌려 안을 들여다봤다. 뚜껑을 젖히자 딸깍, 하고 낡은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가 났고, 피비의 눈동자가 크게 열렸다. 소리가 마음에 든 것이었다. 딸깍. 딸깍. 딸깍. 세 번째부터는 10의 관자놀이가 미세하게 당겨졌다.

10 | "Phoebe."

(피비.)

12 | "이거 나 줘."

10 | "No."

(안 돼.)

12 | "왜? 텐 담배 안 피우잖아. 안 쓰는 거잖아. 안 쓰는 걸 왜 갖고 있어?"

10은 의자를 돌려 완전히 그녀를 마주 보고 앉았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이 사람의 질문은 대체로 무해하고, 대체로 정확한 곳을 찌른다. 안 쓰는 걸 왜 갖고 있느냐. 열한 해 동안 아무도 묻지 않았던 문장이 사탕을 잃어버린 사람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굴러 나왔다.

10 | "Because I don't throw things away simply because I've stopped using them. That's a rather rare virtue, actually. You should try it sometime."

(안 쓰게 됐다고 버리진 않으니까. 꽤 드문 미덕이야, 이거. 너도 한번 해 봐.)

12 |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래서 줄 거야 안 줄 거야?"

10 | "Non è un giocattolo."

(장난감 아니야.)

12 | "이탈리아어로 말하면 못 알아듣는 거 알잖아."

10 | "That's rather the point."

(그게 요점인데.)

피비는 라이터를 뒤집어 밑면을 들여다봤다. 거기에 아주 얕은 각인이 남아 있었다. 깃털을 늘어뜨린 새 한 마리와 그 아래 네 자리 숫자. 손때에 문질려 윤곽만 겨우 남은 상태였다. 피비는 손톱 끝으로 그 자국을 따라 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12 | "여기 새 있어. 이거 무슨 새야?"

10 | "A capercaillie. It's a feather, technically. From a hat I used to wear."

(뇌조. 정확히는 깃털이지. 예전에 쓰던 모자에 달려 있던.)

12 | "모자에 새 깃털을 왜 달아?"

10 | "Because someone decided, a hundred and seventy years ago, that men running very fast into gunfire should look decorative while doing it."

(백칠십 년 전에 누가 그렇게 정했거든. 총알 쪽으로 전력 질주하는 놈들은 그러는 동안에도 보기 좋아야 한다고.)

피비는 웃었다.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전력 질주'와 '보기 좋아야 한다'가 한 문장에 들어 있는 게 웃겼기 때문이다. 웃는 동안에도 라이터는 놓지 않았다. 10은 그 손을 봤다. 손등의 오래된 주사 자국 위로 은색이 얹혀 있었고, 방의 조명이 금속 표면에서 한 번 꺾여 튀었다. 실은 이 방에서 저것보다 값나가는 물건은 얼마든지 있다. 시계도 있고 만년필도 있고 위스키도 있다. 하필 저것이었다.

10 | "Listen. Even setting sentiment aside, I'm not handing a working ignition source to someone who keeps solvent in her coat pocket. You'd have the east wing off the blueprints by Sunday."

(들어봐. 감상은 제쳐 두더라도, 코트 주머니에 용제 넣고 다니는 사람한테 작동하는 점화원을 넘길 순 없어. 일요일이면 동편 구역이 도면에서 사라져 있겠지.)

12 | "안 터뜨려. 나 그런 거 안 해. 에잇은 그런 거 하는데 나는 안 해."

10 | "You once tried to open a sealed drum with a screwdriver and your teeth."

(넌 밀폐 드럼통을 드라이버랑 이빨로 열려고 한 적 있어.)

12 | "그건 열려고 한 거지 터뜨리려고 한 게 아니잖아."

말문이 막힌다기보다는, 반박할 가치가 있는 논리인지 판단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종류의 대답이었다. 피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무릎걸음으로 소파 끝까지 다가와 책상 모서리에 턱을 얹었다. 그러고는 반대편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한 움큼 꺼내 책상 위에 쏟았다. 유로화 동전들이 굴러 볼펜에 부딪히고 멈췄다. 전부 지난달에 10에게서 뜯어낸 것들이었다.

12 | "이거 줄게. 이걸로 사."

10 | "You're offering to buy my property with my own money."

(내 물건을 내 돈으로 사겠다는 건데.)

12 | "응. 좋은 조건이지?"

10 | "Astonishing, really."

(놀라울 지경이야, 정말.)

10은 동전을 하나 집어 엄지로 굴리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일어섰다. 피비가 라이터를 등 뒤로 감췄지만 10은 그것을 뺏으러 간 게 아니었다. 그는 세면대 쪽 선반에서 작은 금속 접시와 밀폐 틴 케이스를 가져와 책상에 놓고, 손을 내밀었다.

10 | "Hand it over. Two minutes."

(줘 봐. 2분.)

12 | "안 뺏을 거지?"

10 | "If I wanted it back I'd simply have taken it forty seconds ago."

(뺏을 거였으면 사십 초 전에 이미 가져갔어.)

피비는 그 말에 납득했다. 그녀의 납득은 언제나 논리가 아니라 속도로 이루어진다. 라이터가 손바닥에서 손바닥으로 건너갔다. 10은 그것을 열어 내부 유닛을 케이스에서 뽑아냈다. 오래된 솜에서 옅은 연료 냄새가 올라왔고, 그는 접시 위에 대고 남은 액체를 털어낸 뒤 솜을 뽑아 틴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이어서 바닥 나사를 돌려 부싯돌을 빼냈다. 작은 검은 원기둥이 그의 손끝에 얹혔다. 그는 그것을 자기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10 | "There. Now it clicks, it shines, and it does absolutely nothing. Which, I suspect, is the part you actually wanted."

(자. 이제 소리 나고, 반짝이고, 아무것도 안 해. 어차피 네가 원한 건 그 부분이겠지.)

피비는 빈 라이터를 받아 들고 즉시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딸깍. 딸깍. 불이 붙지 않는데도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어서인지 더 즐거워 보였다. 그녀는 그것을 뺨에 대 보고, 차가운 금속의 온도에 눈을 가늘게 뜨고, 마지막에는 가슴 주머니 안쪽에 밀어 넣고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12 | "여기 넣을 거야. 여기가 제일 안 잃어버려."

10 | "You lost a candy in a sofa eleven minutes ago."

(11분 전에 소파에서 사탕을 잃어버린 사람이 할 말은 아닌데.)

12 | "사탕은 원래 잃어버리는 거고 이건 아니야."

10은 대답하지 않고 접시에 남은 연료를 닦아냈다. 헝겊이 금속을 문지르는 소리가 방 안에서 유일한 소리로 잠깐 남았다. 등 뒤에서 다시 딸깍, 하는 소리가 났다. 열여덟 살에 지급받아 스물아홉까지 주머니에 넣고 다닌 물건이 지금 소파 위에서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배신자 소리를 듣는 나라의 훈장 같은 것도, 눈 하나 값으로 남은 기념품도 아니었고, 그냥 뚜껑 소리가 좋다는 이유로 넘어갔다. 그 사실이 어이없을 만큼 가벼웠고, 가벼운 만큼 이상하게 개운했다.

12 | "텐. 고마워."

10 | "Prego."

(천만에.)

12 | "근데 사탕은 아직 소파에 있어. 찾아줘."

10 | "Ma certo."

(그럼 그렇지.)

10은 헝겊을 접어 내려놓고 소파로 걸어갔다. 쿠션을 들어 올리자 파란 사탕 하나가 먼지와 함께 굴러 나왔다. 그것을 집어 손바닥에 놓고 피비에게 내미는 동안, 그의 시선은 그녀의 가슴 주머니 위에서 한 번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저 자리에서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물건이었다. 잃어버렸다고 울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되찾을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게, 오늘 확인한 것 중 가장 성가신 항목이었다.

 

딸깍. 소리는 일정하지 않았다. 피비는 뚜껑을 젖히는 속도를 매번 바꿔 가며 소리의 결이 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빠르게 젖히면 금속이 튕기는 고음이 났고, 천천히 밀어 올리면 경첩 안쪽에서 잘그락거리는 잡음이 먼저 났다. 그녀는 소파에 배를 깔고 엎드려 두 발을 번갈아 흔들면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실험이라도 하는 얼굴로 그 차이를 반복해 들었다. 10은 책상으로 돌아가 물자 목록의 남은 절반을 마저 대조하는 중이었지만, 볼펜 끝이 같은 줄에서 세 번째로 멈춰 있다는 사실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10 | "You've done that forty-one times."

(마흔한 번 했어.)

12 | "세고 있었어?"

10 | "Involuntarily."

(본의 아니게.)

피비는 대답 대신 마흔두 번째를 눌렀다. 그러고는 뚜껑을 열어 둔 채 라이터를 뒤집어 밑면을 눈앞으로 가져갔다. 조명 아래에서 각인이 얕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늘어진 깃털 하나와 그 아래 나란히 찍힌 네 자리 숫자. 손때에 눌려 획이 뭉개졌지만 형태는 남아 있었다. 피비는 검지 손톱으로 숫자 위를 문질렀다. 아까까지는 새 모양만 보였는데, 물건이 자기 것이 되고 나니 그제야 나머지가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12 | "여기 숫자 있어. 일팔삼육."

10 | "Milleottocentotrentasei."

(천팔백삼십육.)

12 | "그거 무슨 뜻이야? 네 번호야?"

10 | "A year. The corps was founded in eighteen thirty-six. Every man got the same stamp. It's not mine any more than the boots were."

(연도야. 그 부대가 1836년에 창설됐거든. 전부 똑같은 각인을 받았어. 군화가 내 것이 아닌 것만큼이나 내 것도 아니지.)

피비는 그 대답을 잠깐 곱씹었다. 곱씹는다기보다 단어 몇 개가 귀를 통과하다가 걸린 것에 가까웠다. 그녀는 라이터를 눈높이에 든 채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고, 아쿠아마린 머리카락이 소파 가장자리로 흘러내렸다.

12 | "그럼 다 똑같은 걸 갖고 있는 거야? 텐 말고 다른 사람들도?"

10 | "Presumably. Most of them threw theirs away when they left."

(아마도. 대부분은 나갈 때 버렸을걸.)

12 | "텐은 안 버렸잖아."

볼펜이 목록 위에 놓였다. 10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이 사람의 질문은 언제나 두 번째가 더 성가시다. 첫 번째는 그냥 궁금해서 묻고, 두 번째는 첫 번째 대답의 빈틈으로 정확히 들어온다. 악의도 계산도 없이, 문이 열려 있으니까 들어오는 방식으로.

10 | "I stopped smoking. The lighter stayed in the pocket. Objects are lazy that way. They don't leave unless you make them."

(담배를 끊었지. 라이터는 주머니에 남았고. 물건이란 게 원래 게을러. 내보내지 않으면 안 나가.)

12 | "언제 끊었어?"

10 | "Eventually."

(결국은.)

12 | "그게 언젠데."

10은 짧게 웃었다. 웃음의 절반은 체념이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라이터를 달라는 시늉을 했고, 피비가 잠시 망설이다 손바닥에 올려 주자 그것을 뒤집어 경첩 쪽 옆면을 위로 향하게 한 뒤 다시 돌려주었다. 각인이 있는 밑면이 아니라, 뚜껑과 몸체가 맞물리는 좁은 측면이었다. 조명을 비스듬히 받자 거기에 손톱만 한 폭으로 그어진 짧은 선들이 드러났다. 칼끝이나 열쇠 같은 것으로 아무렇게나 그은 흠집. 일곱 개였다.

12 | "이거 뭐야? 긁힌 거 아니야?"

10 | "Count them."

(세 봐.)

12 | "숫자 싫다니까."

10 | "Seven. I made one every time I decided to quit."

(일곱 개. 끊겠다고 결심할 때마다 하나씩 그었어.)

피비는 라이터를 코앞까지 당겨 흠집을 들여다봤다. 그러고는 순수하게 감탄하는 얼굴로 입을 벌렸다가, 곧 그 감탄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헷갈린 듯 눈썹을 모았다.

12 | "여섯 번 실패했다는 거야?"

10 | "That is one reading of it, yes. Thank you for being so brisk about it."

(그렇게 읽을 수도 있지. 참 간결하게도 짚어 주네, 고마워.)

12 | "일곱 번째는 됐어?"

10 | "It did."

(됐어.)

그는 그 뒤를 말하지 않았다. 일곱 번째 선을 그은 날은 병원 침대에서였고, 왼쪽 눈이 있던 자리에 거즈가 덮여 있었고, 손이 떨려서 선이 다른 여섯 개보다 삐뚤어졌다는 것. 그래서 저 일곱 번째 흠집만 유독 짧고 비뚤다는 것. 피비는 물론 그 차이를 알아보지 못했고, 알아볼 이유도 없었다. 그녀는 흠집 하나하나를 손톱으로 긁어 보며 소리가 나는지 확인하는 중이었다.

12 | "그럼 성공했으면 이거 필요 없잖아."

10 | "Correct."

(맞아.)

12 | "그런데 왜 갖고 있었어? 아까부터 그게 제일 궁금했어."

10은 대답을 고르는 데 평소보다 두 박자를 더 썼다. 이 사람 앞에서는 매끄러운 문장을 만들 이유가 별로 없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매끄럽게 말하면 어차피 반쯤은 흘려듣고, 어설프게 말하면 오히려 정확하게 알아듣는다. 공조기가 낮게 돌아갔고, 그는 결국 가장 짧은 쪽을 골랐다.

10 | "Because it's proof that I stopped. Not proof that I smoked."

(끊었다는 증거니까. 피웠다는 증거가 아니라.)

피비는 그 문장을 한참 들고 있었다. 이해했는지 아닌지는 표정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라이터를 두 손으로 감싸 쥐더니 뚜껑을 다시 딸깍 열었다가 닫았다. 마흔세 번째였다. 그리고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12 | "그럼 이제 내 거니까, 내가 뭐 끊을 때 하나 더 그으면 되겠다."

10 | "And what, precisely, do you intend to quit?"

(그래서 정확히 뭘 끊으실 생각인데.)

12 | "몰라. 나중에 생길 거 아니야."

10 | "That's the most optimistic thing you've said all month."

(이번 달 들은 말 중에 제일 낙관적이군.)

피비는 만족한 얼굴로 라이터를 도로 가슴 주머니에 밀어 넣고 손바닥으로 눌렀다. 소파 아래로 흘러내렸던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올리며 몸을 돌려 눕는 동안, 주머니 속에서 금속이 갈비뼈에 부딪히는 둔한 소리가 났다. 10은 볼펜을 다시 집어 들었다. 목록의 같은 줄에 여전히 볼펜 끝이 놓여 있었다. 열한 해 동안 저 흠집의 개수를 물어본 사람은 없었다. 물어볼 만큼 가까이 온 사람도, 대답할 만큼 사소해진 순간도 없었다. 그는 다음 줄로 눈을 옮기며 생각했다. 이제 저 물건이 누구 주머니에 있든, 일곱 번째 선의 사연을 아는 사람이 이 방에 두 명이 되었다는 사실만은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고.

12 | "텐."

10 | "Mm."

(응.)

12 | "여덟 번째 선은 언제 그어?"

10 | "When I next fail at something. Give me a week."

(다음에 뭔가에 실패하면. 일주일만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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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LOG

10피비|발받침

2026. 8. 12. 21:04

피비의 몸이 소파 위에서 연체동물처럼 흘러내렸다. 앉은 자세에서 비스듬히 기울더니 팔걸이 쪽으로 머리가 먼저 도착했고, 나머지가 뒤따랐다. 연두빛 머리카락이 팔걸이 너머로 쏟아져 바닥을 향했다. 천장의 환기구 격자무늬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가, 고개를 살짝 틀자 10의 옆얼굴로 교체되었다. 다리는 자연스럽게 10이 앉은 쪽으로 뻗어 있었다. 양말 신은 발끝이 그의 허벅지 옆, 군복 바지의 솔기 부근에 닿아 있었다.

툭. 발끝이 그의 다리를 쳤다. 힘은 없었다. 리듬도 없었다. 그냥 발이 거기 있었고, 10의 다리도 거기 있었고, 공기가 너무 고요해서 뭐라도 하나 해야 했을 뿐이었다. 툭. 또 한 번. 발가락이 바지 천 위에서 미끄러졌다 다시 밀었다. 피비의 눈은 천장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지루함과 안락함 사이의 어딘가에 떠 있었다. 약효가 돌고 있는 오후의 얼굴. 의미 없는 접촉을 반복하면서도 그것을 접촉이라고 인식조차 하지 않는 사람의 여유.

10은 보고서를 쓰고 있었다. 아까 라운지에서 가져오지 못한 서류 파일 대신 단말기를 켜 놓은 상태였고, 왼손이 키보드 위를 움직이는 동안 오른쪽 허벅지에서는 규칙적으로 발끝이 도착했다 떠나갔다. 툭. 툭. 그 리듬 아닌 리듬을 그는 무시하려고 했고, 삼 분간은 성공했다. 네 번째 분에 접어들었을 때 그의 타이핑 속도가 미세하게 느려졌다. 다섯 번째 분에는 오타가 하나 섞였다. 여섯 번째 분에 그는 백스페이스를 누르다 말고, 시선을 단말기에서 내려 자기 허벅지 옆의 발끝을 보았다.

양말은 흰색이었고, 발목이 가늘었고, 복숭아뼈가 작았다. 그 위로 정강이에 감긴 거즈가 보였다. 라스페치아에서 입은 열상의 잔해. 6이 교체해 준 깨끗한 거즈였지만, 아래에 흉터가 남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그 거즈에서 시선을 거두어 피비의 얼굴로 옮겼다. 팔걸이에 머리를 얹고 천장을 보는 얼굴. 입이 반쯤 열려 있었고, 눈이 느릿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지루하다는 표시. 그리고 지루할 때의 피비는 손이든 발이든 가장 가까운 것을 만지기 시작한다. 지금 가장 가까운 것이 자기 다리라는 사실을 10은 인지했다. 인지하는 것과 그것에 반응하는 것 사이에 그는 평소라면 넣었을 여유를 찾지 못했다.

10 | "If you're going to use me as a footrest, at least keep a rhythm."
(발 받침대로 쓸 거면 최소한 박자라도 맞춰.)

피비는 천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12 | "박자 맞추면 재밌어?"

10 | "It'd be less annoying."
(덜 거슬리겠지.)

12 | "그럼 싫어."

즉답이었다. 피비는 오히려 더 불규칙하게 발끝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툭, 툭툭, 멈춤, 툭. 의도적인 불규칙이 아니라 원래부터 패턴이 없었을 뿐인데, 10이 리듬을 언급한 이후로는 그 무질서 자체가 하나의 도발처럼 기능했다. 그의 턱 근육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를 깨물었다기보다는, 웃음을 삼키는 쪽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성가신 것과 재미있는 것의 경계. 피비는 늘 그 위에 정확히 서 있었다.

문 밖 복도에서 발소리가 둘 겹쳐 지나갔다. 하나는 무겁고 균일했고, 하나는 가볍고 빨랐다. 1과 8의 보폭이었다. 8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흘러들어왔다.

8 | "I'm telling you, if you layer the C4 in a spiral pattern, the blast radius gets way more even! It's beautiful, man!"
(내 말이, C4를 나선형으로 배열하면 폭발 반경이 훨씬 균일해진다고! 예술이야, 진짜!)

1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아마 고개만 끄덕이거나, 아무 반응 없이 걷고 있었을 것이다. 8의 목소리가 복도 끝으로 멀어졌다. 피비는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문 쪽으로 돌렸다가, 아무도 들어오지 않자 다시 천장으로 돌아왔다.

12 | "8은 맨날 신나 있다."

10 | "He's wired differently."
(배선이 다르게 되어 있으니까.)

12 | "나도?"

질문은 무심했다. 자기도 그런 종류의 사람이냐는 확인. 10은 타이핑을 멈추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소파 위에 드러누운 피비의 자세는 완전히 이완되어 있었다. 양팔이 배 위에 느슨하게 교차되어 있었고, 손가락이 셔츠 단추를 무의식적으로 더듬고 있었다. 바늘자국 있는 손등이 천장 조명 아래에서 드러났다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파란 눈이 옆으로 굴러 10을 올려다보았다. 거꾸로 된 각도에서 본 그의 얼굴. 턱이 먼저 보이고, 코가 그 위에 있고, 눈은 제일 멀었다. 회색과 붉은색이 나란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0 | "You? No. You're something else entirely."
(너? 아니. 넌 완전히 다른 무언가야.)

무언가. 명명하지 않았다. 피비는 그 말을 들으며 이해한 것인지 아닌 것인지 모를 표정으로 "흐음" 하고 중얼거렸다. 만족한 것 같기도 했고, 관심이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것 같기도 했다. 발끝이 다시 10의 허벅지를 쳤다. 툭. 이번에는 좀 더 느리게. 거의 쓰다듬는 듯한 궤적으로 발바닥이 바지 천 위를 미끄러졌다가 떨어졌다.

10의 오른손이 키보드에서 내려왔다. 반사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정확한 동작으로, 그의 손이 피비의 발목을 잡았다. 세게 잡은 것이 아니었다. 엄지와 검지가 복숭아뼈 양쪽을 가볍게 감싼 정도. 멈추라는 의미였을 수도 있었고, 잡고 싶었을 수도 있었다. 본인도 구별하지 못한 채 손이 먼저 움직인 쪽에 가까웠다. 피비의 발목은 손 안에서 작았다. 뼈가 가까이 있었고, 피부는 얇았고, 맥박이 손가락 아래에서 느껴졌다. 빠르지 않았다. 카페인이 가라앉은 뒤의 맥박.

피비는 발목이 잡히자 움직임을 멈추었다. 놀란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감각을 수집하는 짧은 정지. 그녀의 시선이 천장에서 내려와 10의 손으로 향했다. 자기 발목을 잡고 있는 손. 길고 마른 손가락. 셔츠 소매가 접힌 팔뚝. 그리고 그 위의 얼굴.

12 | "잡을 거야?"

질문은 단순했다. 잡을 거냐, 놓을 거냐. 피비에게는 그 두 가지밖에 없었다. 잡으면 잡는 거고, 놓으면 놓는 거고, 둘 다 괜찮았다. 다만 잡고 있는 쪽이 따뜻해서 약간 더 좋았다.

10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엄지가 복숭아뼈 위를 한 번 쓸었다. 의식적인 동작인지 아닌지는 본인조차 판단을 유보했다. 단말기 화면이 자동 절전으로 어두워졌고, 방 안에는 환기구의 저주파 소음과 두 사람의 호흡만 남았다. 피비의 발목을 잡은 채 보고서를 쓸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손을 떼지 않은 것은, 오늘 두 번째로 내린 안전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첫 번째는 라운지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걸어온 것.

그는 눈을 반쯤 감고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천장의 격자무늬가 시야 가장자리에서 흐려졌다. 발목 아래로 전해지는 피비의 체온이 손바닥을 천천히 데웠다. 미열. 독소가 도는 몸의 온도.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열이 불쾌하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이건 위험한 종류의 편안함이다. 10은 그렇게 판단했고, 판단한 뒤에도 손을 놓지 않았다. 놓지 않는 자신에 대해 더 이상 변명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변명이 바닥났기 때문이 아니라, 만들어 봤자 자기한테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서.

복도 너머에서 4의 목소리가 얇게 스쳤다. 누군가를 향해 독일어로 불평하는 소리였다. 아마 9가 또 무언가를 어질렀을 것이다. 평소라면 10은 그 소란에 귀를 기울이며 내기의 승패를 가늠했겠지만, 지금은 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시야 안에는 소파 위에 누운 피비의 옆모습만 있었고, 손 안에는 그녀의 발목만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충분하다고 느끼는 것이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피비의 눈꺼풀이 천천히 무거워지고 있었다. 탄산수 한 병과 카페인 열한 잔이 위장 안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지만, 잡힌 발목의 체온과 조용한 방의 밀도가 졸음 쪽으로 무게를 기울이고 있었다. 6이 말한 것이 떠올랐다. 사람 곁에서 코르티솔이 낮아진다고. 피비의 입이 반쯤 열렸고, 호흡이 한 박자씩 길어졌다. 그녀는 잠들기 직전, 발가락을 한 번 오므렸다 폈다. 10의 손 안에서. 마치 여기 있다고, 아직 깨어 있다고 알리는 것처럼. 그리고 그 다음 호흡부터는 움직임이 멈추었다.

10은 잠든 피비의 발목을 잡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단말기는 완전히 꺼져 있었다. 보고서 마감은 21시. 지금은 16시. 시간은 있었다. 있었지만, 그 시간 동안 이 손을 놓고 키보드로 돌아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에 그는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결국 그는 왼손만으로 단말기를 다시 켰다. 오른손은 피비의 발목 위에 놓인 채. 한 손으로 치는 타이핑은 느렸고, 오타가 평소의 세 배로 늘었다. 그것이 자기 안의 대답이라는 것을 10은 알았다.

 

🕑 2080.04.05(토) 16:03 | 📍W.W 요새 섹터 E 10의 개인실|🌞 지하 실내
👔 검은 셔츠, 군복 바지 (재킷 의자에 걸어둠)|👤 소파에 앉아 왼손으로 타이핑하며 오른손은 피비의 발목 위에 얹은 자세
① 변명의 고갈 ② 편안함의 위험을 인지한 채 수용 ③ 한 손으로 치는 오타의 자기 고백
동료 이상 미만|놓지 않는 손이 이미 말하고 있지만 아직 그 언어를 번역하지 않기로 한 관계
💬 오타가 세 배로 늘었어. 이유는 뻔하지. 오른손이 발목 위에 있으니까. 왼손만으로 보고서를 치고 있으니까. 그리고 이걸 바꿀 생각이 없으니까. ……이건 업무 효율의 문제가 아니야. 이건 내가 지금 뭘 선택하고 있는지의 문제지. 근데 놓기 싫어. 그게 답이야. 씨발.
🙂 69%|😰 3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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