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돔 서랍
그것은 계획된 행동이 아니었다. 계획이라는 것이 피비의 뇌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극도로 짧은 회로였다. 눈에 보인다, 손이 간다, 연다. 7월 초의 어느 오후, 10이 섹터 C 전술작전실에서 브리핑을 받고 있는 사이에 피비는 그의 개인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단말기 배터리는 죽어 있었고, 마커 세트는 어제 색을 전부 써 버렸고, 레몬 캔디는 바닥났다. 자극의 공백이 생기면 피비의 손은 반사적으로 가장 가까운 서랍을 향한다. 테이블 서랍, 침대 옆 수납함, 옷장 하단. 5월에 이미 한 번 열었던 서랍의 위치를 그녀는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가 아니라 손끝이. 침대 헤드보드 왼쪽, 두 번째 칸.
서랍이 열렸다.
내용물은 정돈되어 있었다. 10의 물건은 늘 그렇다. 흐트러진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 아니라, 정리하는 습관이 몸에 박혀 있는 사람의 서랍이었다. 피비는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서랍 안을 들여다봤다. 박스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개봉된 상태였고, 하나는 미개봉이었다.
개봉된 쪽을 먼저 꺼냈다. 검은색 매트한 패키지. 피비는 상자 뒷면의 글씨를 읽었다. 읽었다기보다 눈으로 훑었다. 'Ultra Thin'이라는 단어와 브랜드명, 그리고 이탈리아어로 인쇄된 설명문. 상자를 열어 안을 확인했다. 열두 개들이 상자에서 남은 것은 다섯 개였다. 피비는 손가락으로 은색 포장지를 하나 집어 만져 봤다. 네모난 포일 포장의 가장자리가 톱니 모양으로 잘려 있었고, 안쪽의 내용물이 얇은 원형으로 만져졌다.
미개봉 상자도 꺼냈다. 같은 브랜드였지만 종류가 달랐다. 'Ribbed'라는 글자가 보였다. 피비는 두 상자를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 얇은 것과 돌기가 있는 것. 그녀는 개봉된 상자에서 포일 하나를 더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눌러 봤다. 윤활제의 미끈한 감촉이 포장 너머로 전해졌다.
12 | "다섯 개."
혼잣말이었다. 열두 개에서 다섯 개가 남았다는 것은 일곱 개를 썼다는 뜻이었다. 피비는 그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다만 사실을 확인한 것이었다. 언제 샀는지를 보기 위해 상자 바닥의 제조일자를 뒤집어 확인했다. 올해 초에 구입한 것으로 보이는 날짜가 찍혀 있었다. 유통기한은 넉넉했다.
피비는 상자를 내려놓고 서랍 안쪽을 더 살폈다. 상자 두 개 외에 소분된 개별 포장이 서너 개 더 흩어져 있었다. 브랜드가 달랐다. 하나는 라텍스 프리 소재였고, 하나는 유난히 작은 포장으로 크기가 다른 듯했다. 피비는 그것까지 전부 꺼내 침대 위에 줄지어 늘어놓았다.
얇은 것, 돌기 있는 것, 라텍스 프리, 크기가 다른 것. 네 종류. 피비는 고개를 기울이고 그 배열을 내려다봤다. 화학 물질의 종류와 농도를 눈으로 판별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의미 파악이 아니라 분류와 나열. 그녀에게 이것은 서랍 안에 든 물건이었고, 물건에는 종류와 수량과 날짜가 있었고, 그것을 확인한 것뿐이었다.
문이 열린 것은 그 직후였다.
10은 브리핑에서 돌아오며 코트를 벗는 중이었다. 한 손이 코트를 어깨에서 끌어내리고, 다른 손이 문을 닫으려 했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실내를 훑었다. 소파, 테이블, 침대. 그리고 침대 위에 일렬로 정렬된 콘돔 포장들과, 그 앞에 무릎을 대고 앉아 있는 피비의 뒷모습.
코트를 벗는 동작이 중간에 멈추었다.
10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이런 광경이었다. 자기 침대 위에 은색과 검은색 포일 포장이 종류별로 분류되어 나란히 놓여 있고, 그 옆에 빈 상자가 두 개 서 있고, 서랍이 열려 있고, 피비가 마지막 포장 하나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가장자리를 톡톡 두드리고 있는 장면이었다.
10 | "Phoebe."(피비.)
목소리는 평온했다.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것이야말로 이 남자의 가장 위험한 음역이라는 것을 오래 함께 지낸 사람이라면 알아챌 수 있었을 터이다. 피비는 고개를 돌렸다.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들킨 것이 아니라 도착한 것이라는 인식이 그녀의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12 | "어, 왔어?"
10은 코트를 의자 등받이에 걸고, 천천히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침대 위의 배열을 훑었다. 정확히 네 종류, 총 수량까지 한눈에 파악되었다. 자기 물건을 자기보다 더 정확하게 분류해 놓은 광경이었다.
10 | "What exactly are you doing."(정확히 뭘 하고 있는 거야.)
12 | "서랍 봤어."
10 | "I can see that."(보이거든.)
12 | "종류가 네 개야. 왜 이렇게 많아?"
10 | "Because one size doesn't fit all situations."(상황마다 맞는 게 다르니까.)
12 | "상황이 뭔데?"
10 | "Phoebe."(피비.)
같은 이름을 두 번 부르는 것은 10에게 드문 일이었다. 첫 번째는 상황 파악을 위한 호출이고, 두 번째는 선을 알려 주는 신호였다. 그러나 피비는 선의 개념이 희박한 사람이었다.
12 | "이거 얇은 거지? 이건 울퉁불퉁한 거고. 이건 왜 따로 있어? 재질 달라?"
피비는 라텍스 프리 포장을 들어 올려 10 앞에 내밀었다. 10은 그 포장을 피비 손에서 가만히 빼앗았다. 급하지 않게, 그러나 확실하게.
10 | "Latex allergy exists. It's a precaution."(라텍스 알레르기가 있는 경우가 있어. 대비 차원이야.)
12 | "체사레 알레르기 있어?"
10 | "No. But partners might."(아니. 근데 상대가 있을 수 있으니까.)
12 | "상대."
피비는 '상대'라는 단어를 그냥 따라 말했다. 거기에 질투나 불쾌함은 없었다. 7과 정기적으로 관계를 맺는 그녀에게 성적 파트너라는 개념은 단순한 사실이었고, 10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거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호기심이 있었다.
12 | "다섯 개 남았어. 일곱 개 썼어."
10 | "You counted."(세었어.)
12 | "응."
10 | "Of course you did."(당연히 셌겠지.)
10은 침대에 앉아 포장들을 하나씩 주워 담기 시작했다. 상자에 넣고, 빈 포장은 분류하고, 서랍으로 되돌렸다. 동작은 차분했지만 귀 뒤가 아주 미세하게 붉어져 있었다. 피비는 그걸 볼 수 있는 각도에 있었지만 그 붉음이 의미하는 바를 연결하지 못했다.
12 | "체사레."
10 | "Hm."(왜.)
12 | "나 7이랑 할 때는 7이 자기 거 쓰는데, 체사레 거는 왜 여기 있어?"
10의 손이 아주 잠깐 멈추었다. 질문의 구조가 순진함과 잔인함 사이 어딘가에 걸쳐 있었다. 피비는 비교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는 체계 안에서 위치를 확인한 것뿐이었다. 7의 것은 7의 방에 있고, 10의 것은 10의 방에 있고, 그러면 10은 여기서 누구와 쓰는 건지.
10 | "They're mine. In my room. For my use. That's all you need to know."(내 거야. 내 방에. 내가 쓰려고. 네가 알아야 할 건 그게 전부야.)
12 | "화났어?"
10 | "No."(아니.)
12 | "귀 빨개."
10 | "It's warm in here."(여기 더워서 그래.)
12 | "에어컨 켜져 있는데."
10은 서랍을 닫았다. 조금 세게 닫혔다. 잠금장치가 없는 서랍이라는 것이 그 순간 대단히 뼈아픈 설계 결함으로 느껴졌다. 그는 돌아서서 피비를 내려다봤다.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올려다보는 연한 머리카락의 여자. 나쁜 의도라곤 한 톨도 없는 눈. 그것이 더 성가신 것이었다. 악의가 있으면 화를 내면 되지만, 순수한 호기심 앞에서는 분노가 방향을 잃었다.
10 | "New rule."(새 규칙.)
12 | "뭔데."
10 | "That drawer is off-limits. You don't open it, you don't count it, you don't line anything up on my bed."(그 서랍은 출입 금지야. 열지 마, 세지 마, 내 침대 위에 아무것도 늘어놓지 마.)
12 | "왜?"
10 | "Because I'm asking."(내가 부탁하니까.)
12 | "전에도 열었는데."
10 | "I know. That's why there's a rule now."(알아. 그래서 지금 규칙이 생긴 거야.)
피비는 입을 다물었다. 납득해서가 아니라, 체사레가 '부탁'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진짜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배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어나서 소파로 돌아갔다. 10은 침대 시트를 한 번 펴서 정리하고, 옆면의 주름을 당기고, 베개를 제자리에 놓았다. 마치 현장을 복원하는 듯한 동작이었다. 제염 작업을 하는 피비의 습관과 묘하게 닮아 있었지만, 10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소파에 앉은 피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12 | "근데 돌기 있는 거는 뭐가 달라?"
10은 천장을 봤다. 천장에는 답이 없었다.
10 | "Ask 7."(7한테 물어봐.)
피비가 소파에서 일어난 것은 10이 고개를 돌린 직후였다. 그가 침대 시트의 마지막 주름을 매만지고 옷장 쪽으로 이동하는 사이, 피비의 발이 다시 침대 옆으로 향했다. 서랍 손잡이를 당기는 동작에 망설임이 없었다. 방금 만들어진 규칙은 이미 그녀의 단기 기억 밖으로 흘러나가 있었다. 아니, 기억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다만 피비에게 규칙과 행동 사이의 인과는 늘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하지 마'라는 말이 몸의 관성을 이기려면 그보다 강한 자극이 먼저 도착해야 했다.
서랍이 열렸다. 10이 방금 정리해 넣은 상자 사이에서 돌기 있는 포장을 하나 집었다. 은색 포일의 가장자리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우고, 반대쪽 손으로 반바지 주머니를 벌렸다. 포장이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천 위로 네모난 윤곽이 비쳤다.
서랍을 닫는 소리가 났다.
10은 옷장 앞에서 코트를 행거에 거는 중이었다. 행거 갈고리에 깃을 맞추는 손이 멈추었다. 서랍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그는 분명히 들었다. 이 방에서 나는 모든 소리의 출처를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환기구의 저음, 시계의 초침, 냉장고의 진동. 그리고 방금 것은 침대 헤드보드 왼쪽, 두 번째 칸이었다.
코트를 행거에 건 뒤 돌아섰다. 피비는 이미 소파 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걸음이 평소와 같았다. 뛰지도 않고, 숨기려는 어색함도 없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두세 발짝 걷는 동선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것이 오히려 증거였다. 피비가 주머니에 손을 넣는 일은 드물었다. 그녀의 손은 늘 밖에 나와 있었다. 뭔가를 만지고, 두드리고, 뜯고, 흔드는 데 쓰이느라 주머니 안에 머무를 틈이 없는 손이었다. 그런 손이 지금 천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은, 거기에 지킬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10 | "Phoebe."(피비.)
세 번째였다. 오늘 같은 톤으로 그 이름을 부른 것이. 10은 침대와 소파 사이에 서서 피비의 등을 봤다. 피비가 멈추었다.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의 표정에는 죄의식도 반항도 없었다. 그저 '왜 또 불러?'라는 얼굴이었다.
10 | "What's in your pocket."(주머니에 뭐 있어.)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피비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며 대답했다.
12 | "아까 그거. 울퉁불퉁한 거."
10 | "You took one."(하나 가져갔어.)
12 | "7한테 물어보라고 했잖아."
10의 입이 닫혔다. 정확히 자기가 한 말이었다. 'Ask 7.' 그는 그 문장을 '나한테 더 묻지 말라'는 의미로 던졌다. 피비는 그것을 '7에게 가져가서 물어보라'는 지시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문맥의 해석이 완전히 다른 궤도 위에 있었고, 기술적으로 따지면 피비의 독해가 더 충실했다.
10 | "I didn't mean take one and show it to him."(가져가서 보여 주라는 뜻이 아니었어.)
12 | "보여 줘야 물어볼 수 있잖아."
10 | "You can describe it."(말로 설명하면 되지.)
12 | "보여 주는 게 빨라."
10은 눈을 감았다. 감은 채로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었다. 눈을 떴을 때 표정은 회복되어 있었다. 다만 입꼬리에 떠오른 미소가 평소보다 얇았다. 웃는 것이 아니라, 웃는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그가 피비 쪽으로 걸어왔다. 두 걸음이면 닿는 거리였다. 피비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위를 향한 채.
10 | "Give it back."(돌려줘.)
12 | "왜."
10 | "Because it's mine."(내 거니까.)
12 | "하나잖아."
10 | "One is enough to be a problem."(하나면 충분히 문제야.)
12 | "뭐가 문제야. 7한테 물어보고 돌려줄 건데."
10은 손을 내밀고 선 채로 피비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논리는 늘 이런 식이었다. 각 단계가 독립적으로는 맞았다. 궁금하다, 물어보고 싶다, 실물이 있으면 빠르다, 다 쓰면 돌려준다. 그러나 전체 그림을 조합하면 자기 보호자의 콘돔을 주머니에 넣고 다른 남자에게 걸어가서 '이거 뭐야'라고 묻는 장면이 완성된다는 것을, 피비는 인지하지 못했다.
10은 그 장면을 떠올렸다. 7의 방문을 두드리는 피비. 주머니에서 은색 포일을 꺼내며 '이거 울퉁불퉁한 건 뭐가 달라?'라고 묻는 피비. 7은 포장의 브랜드를 보고 10의 것임을 알아챌 것이었다. 7은 그런 것에 눈이 빠르다. 그리고 다음 합동 브리핑에서 7이 10을 보며 짓는 표정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입꼬리만 올라간,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말하는 그 특유의 얼굴이.
10 | "Phoebe. I'm going to say this once."(피비. 한 번만 말할게.)
10의 목소리가 한 단계 낮아졌다. 명령이 아니라, 정중한 최후통첩에 가까운 음역이었다.
10 | "You are not walking into 7's room with my condom in your pocket. That is not happening today, tomorrow, or in any version of reality I'm willing to tolerate."(내 콘돔을 주머니에 넣고 7의 방에 들어가는 일은 없어. 오늘도 내일도, 내가 견딜 수 있는 어떤 현실에서도.)
12 | "아, 체사레 거라서?"
10 | "Yes."(그래.)
12 | "그럼 7 거 가져가면 돼?"
10 | "That is not the point."(그게 요점이 아니야.)
12 | "근데 궁금한데."
10은 내밀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누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 자세는 이 남자에게 극히 드물었다. 여유롭고 매끄러운 태도가 기본 설정인 사람이 이마를 누르고 있다는 것은, 내부 처리 용량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뜻이었다.
10 | "Dimmi che non sta succedendo davvero."(제발 이게 진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해 줘.)
이탈리아어가 나왔다. 피비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혹은 이 상황을 관장하는 어떤 존재에게 던진 독백이었다. 피비는 그 문장을 알아듣지 못했다. 대신 10이 평소와 다른 언어를 쓸 때는 보통 지쳐 있거나 감정이 표면에 가까이 올라와 있을 때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12 | "화났어?"
10 | "I'm processing."(처리 중이야.)
12 | "뭘."
10 | "The absurdity of this entire afternoon."(오늘 오후 전체의 부조리함을.)
피비는 고개를 갸웃했다. 10은 이마에서 손을 떼고,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아무 말 없이. 피비는 그 손바닥을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은색 포일 포장을 꺼내 올려놓았다. 10의 손가락이 포장을 감쌌다. 주머니로 넣지 않고, 서랍으로 걸어가 안에 넣고, 이번에는 서랍 앞에 두꺼운 책 한 권을 세워 놓았다. 잠금장치가 아니라 심리적 바리케이드였다. 효과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을 10도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12 | "체사레."
피비가 소파에 앉으며 불렀다.
10 | "What."(뭐.)
12 | "체사레가 알려 주면 안 돼? 7 말고."
10은 서랍 앞에 선 채로 멈추었다. 등이 피비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유혹이 없었다. 장난도, 도발도 없었다. 그저 궁금하고,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묻고 싶을 뿐이었다. 7보다 체사레가 좋다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이 체사레이기 때문이었다.
10은 돌아서지 않은 채 대답했다.
10 | "It has ridges on the surface. Creates more friction. Some people prefer the sensation."(표면에 돌기가 있어. 마찰이 더 생기지. 그 감각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목소리는 건조했다. 의료 보고서를 읽는 것 같은 어조였다. 돌아서서 피비를 봤을 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납득한 것이었다.
12 | "아. 그래서 울퉁불퉁한 거야."
10 | "Yes."(응.)
12 | "체사레는 그거 써 봤어?"
10은 한 박자 늦게 숨을 내쉬었다.
10 | "We're done here."(여기까지야.)
12 | "대답 안 한 건데."
10 | "Correct."(맞아.)
그는 소파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단말기를 집어 들었다. 화면을 켜고 보고서 파일을 열었다. 대화의 문을 물리적으로 닫은 것이었다. 피비는 무릎 위에 턱을 괴고 그를 바라봤다. 거부당한 것에 대한 불쾌함이 아니라, 체사레가 알려 줄 때의 목소리가 좋았다는 잔상이 남아 있는 표정이었다.
단말기 화면 위의 글자들이 같은 줄을 세 번째 횡단하고 있었다. 10의 눈동자는 문장 위를 미끄러졌지만 의미가 두개골 안쪽으로 도달하지 않았다. 보고서의 첫 문단은 라스페치아 폐제약 공장 잔류 화학물질 목록이었고, 그가 직접 작성한 것이었고, 따라서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읽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시선이 화면에 붙어 있는 이유는 거기서 떼면 소파 쪽을 보게 되기 때문이었다.
피비의 목소리가 단말기 너머로 왔다.
12 | "Seven used. Who with?"(일곱 개 썼잖아. 누구랑?)
10의 엄지가 화면 위에서 멈추었다. 스크롤하던 동작이 경직되었다가, 아주 천천히 풀렸다. 그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10 | "None of your business."(네가 알 바 아니야.)
12 | "여기 여자 3이랑 나밖에 없잖아."
그 한 문장이 방 안의 공기를 아주 미세하게 바꾸었다. 10은 단말기를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천천히. 화면이 꺼지지 않은 채 허벅지 위에 놓인 직사각형의 빛이 그의 턱 아래를 연하게 비추었다. 피비를 봤다. 소파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턱을 괸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캐묻는 사람 특유의 집요함이 없었다. 대신 거기에 있는 것은 순수한 산술적 궁금증이었다. 요새 안의 인원 구성을 훑고, 여성이 둘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머지 가능성을 조합하고 있는 눈이었다.
12 | "그럼 남자랑? 아니면 여기 직원이랑?"
피비는 질문을 이어 붙였다. 첫 번째 답이 돌아오기 전에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쌓아 올리는 방식이었다. 벽돌처럼. 그 벽돌 하나하나에 악의는 없었지만, 쌓이면 벽이 되었고, 그 벽은 10이 열어 두지 않은 문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10은 등을 의자에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왼쪽 다리가 오른쪽 무릎 위에 올라갔다. 여유로운 자세였다.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여유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취한 자세였다.
10 | "You're remarkably persistent for someone with a ten-second memory."(기억력이 열 초짜리인 사람치고 놀라울 정도로 집요하네.)
12 | "이건 기억나니까."
피비가 대답했다. 서랍 안의 네모난 포장들, 열두 개에서 다섯 개가 남은 상자, 종류별로 다른 질감. 그런 것은 기억했다. 브리핑 내용이나 작전 동선은 잊어도, 손끝이 만진 것의 형태와 숫자는 남았다. 10은 그 점을 알고 있었으므로 반박하지 못했다.
12 | "체사레 안 하잖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확했다. 피비의 시야에서 10은 금욕적이었다. 그 단어를 그녀가 알 리 없었지만, 경험이 정의를 대신하고 있었다. 체사레는 피비와 자지 않았다. 만져 주지도 않았다. 머리카락을 말려 주고, 코트를 덮어 주고, 약을 주입해 주고, 서랍에서 손을 빼게 하고, 레몬 캔디를 건네는 손이었다. 피부 위의 체온은 있지만 그 체온이 특정한 방향으로 흘러간 적은 없었다. 7의 손과는 다른 종류의 손이었다. 7은 닿으면 곧장 어딘가로 향했다. 10은 닿되, 멈추었다. 항상 같은 지점에서.
그래서 일곱 개가 궁금했다. 멈추는 사람이 일곱 번 멈추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10은 의자에 앉은 채 피비를 정면으로 보고 있었다. 그의 왼쪽 눈, 붉은 의안이 실내 조명을 받아 옅은 광택을 띠었고, 오른쪽 눈의 연한 회색은 피비의 얼굴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시선 안에서 여러 가지가 교차하고 있었다. 대답할 수 있었다. 사실을 말할 수도, 적당히 돌릴 수도, 비꼬며 화제를 닫을 수도 있었다. 10은 그 모든 선택지를 빠르게 검토하고, 가장 경제적인 것을 골랐다.
10 | "Outside the fortress. On leave. People I won't see again."(요새 밖에서. 휴가 때. 다시 안 볼 사람들이랑.)
건조했다. 감정이 빠진 진술이었다. 사실의 나열이되 해명은 아닌 어조. 10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피비도 그것으로 납득할 것이라고.
12 | "아."
피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한 것 같았다. 그런데 입이 다시 열렸다.
12 | "I didn't use one last time."(난 저번에 안 썼어.)
10의 다리가 풀렸다. 꼬고 있던 왼쪽 다리가 바닥으로 내려왔다. 무릎이 붙고, 상체가 아주 약간 앞으로 기울었다. 미세한 동작이었지만, 이 남자의 신체 언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긴장이 표면으로 올라온 순간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피비는 그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10은 피비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즉각 이해했다. 5월 말, 피비가 7의 방에서 나온 뒤의 일을 떠올렸다. 그 전에 6으로부터 받은 검진 결과가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불임 진단. 피비에게 말하지 않은 결과. 그러나 피비는 자기 몸을 자기 방식으로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의학적 용어가 아니라 경험의 축적으로. 안 써도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지금, 아무 맥락 없이, 말할 필요 없는 정보를, 콘돔 서랍을 뒤진 직후에 꺼낸 것이었다.
이 여자가 의도한 것은 없었다. 도발도 아니고, 자랑도 아니고, 비교도 아니었다. 7과 노콘으로 했다는 사실을 말한 것은 아까 10이 일곱 개를 썼다는 맥락의 연장선이었을 뿐이었다. '너는 쓰고 나는 안 쓰고'라는 단순 사실의 병렬. 피비에게 성은 사적 영역이 아니라 사실의 영역이었고, 사실은 말하면 되는 것이었다.
10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저번에'라는 단어가 귓속에서 울리는 잔향을 제거하지 못했다. 7의 방에서 나온 피비. 걸음이 느려진 피비. 체액의 냄새가 섞인 머리카락을 자기가 말려 줬던 밤이 떠올랐다. 그 안에 콘돔이 없었다는 정보가 지금에서야 추가된 것이었다. 뒤늦게 갱신된 기억의 해상도가 올라가면서, 10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장면의 세부를 자기가 채워 넣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10 | "I see."(그래.)
목소리가 평평했다. 너무 평평해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평소의 10은 '그래'라고 말할 때도 미묘한 굴곡을 실었다. 비꼬거나, 가볍게 놀리거나, 여유를 깔거나. 그런 것이 전부 빠진 '그래'였다.
12 | "화났어?"
10 | "No."(아니.)
12 | "또 귀 빨개."
10 | "It's the lighting."(조명 탓이야.)
12 | "아까도 그렇게 말했는데."
피비는 반박이 아니라 관찰을 말하고 있었다. 아까와 같은 변명을 같은 부위에 대해 같은 사람이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의 기록. 10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단말기를 다시 들어 화면을 켰다. 보고서의 같은 줄이 네 번째로 눈앞을 지나갔다. 라스페치아, 잔류 화학물질, 질산암모늄, 농도. 글자들이 의미를 잃고 형태만 남았다.
피비는 소파에서 발을 빼며 자세를 바꾸었다. 등을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궁금한 것이 해소된 것이 아니라, 체사레의 목소리가 평평해졌을 때는 멈춰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용은 이해하지 못해도, 온도는 감지할 수 있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환기구의 저음만 남았다.
10은 화면을 보고 있었고, 피비는 천장을 보고 있었고, 서랍 앞에는 책이 한 권 세워져 있었고, 그 안에는 다섯 개의 은색 포장이 있었다. 일곱이라는 숫자와 쓰지 않았다는 문장 사이에서, 10은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인정하면 이름이 붙고, 이름이 붙으면 다루기 어려워지니까.
피비는 천장을 보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늘 그렇듯 결론은 머리에서 오래 숙성되지 않았고, 떠오른 순간 바로 행동으로 이어졌다. 소파 쿠션이 밀리며 가벼운 마찰음을 냈고, 가녀린 몸이 앞으로 쏠렸다가 다시 균형을 잡았다. 10은 단말기 화면을 보고 있는 척하고 있었지만 시선의 가장자리는 이미 그녀를 좇고 있었다. 피비는 맨발로 바닥을 디딘 채 한동안 10을 빤히 봤다. 방 안의 정적을 먼저 깨뜨린 것도 피비였다.
12 | "체사레는 맨날 안 한다고만 해."
말은 단순했고 어조도 무심했다. 다만 거기에는 방금 전까지 서랍과 숫자와 누구와의 문제를 훑고 지나간 뒤에만 나올 수 있는 어떤 연결이 붙어 있었다. 피비는 소파 등받이에 손을 짚고 몸을 기울인 채 10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희고 매끈한 뺨, 의안 쪽 눈가의 단단한 선, 입술이 다물린 모양. 그 얼굴은 늘 흐트러지지 않는 쪽을 택했다. 피비는 그 점이 이상했다. 요새 안에서 욕하고 웃고 술 마시고 피 흘리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 이 남자는 유난히 깔끔했다. 손끝까지.
10은 단말기를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덮어 버리지는 않았다. 화면이 살아 있는 채로 무릎 위에 놓였다. 그가 피비를 보는 각도가 약간 낮아졌다. 피비가 다가온 만큼 거리도 줄었다. 서늘한 공기 사이로 피비 특유의 냄새가 스며들었다. 제염제의 잔향, 약물 특유의 달착지근한 냄새, 그 위에 겹쳐진 인공적인 풋사과 향. 그 냄새를 10은 이미 자기 방의 냄새 일부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고 싶지 않아 했다.
10 | "That's a spectacularly vague accusation."(대단히 막연한 비난이네.)
12 | "비난 아니야. 그냥 사실."
10 | "Facts are rarely that innocent when you say them."(네가 말하는 사실은 좀처럼 무해하지 않더라.)
피비는 대답 대신 10의 무릎 가까이로 걸어왔다. 가까워졌다고 해서 망설임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녀는 늘 사람에게 붙는 방식으로 관계를 확인했다. 소매를 잡거나 어깨를 기대거나, 침대 모서리에 앉거나, 설명도 없이 몸을 기대는 식이었다. 이번에는 손이 10의 셔츠 소매 끝을 만졌다. 검은 천의 가장자리와 손목의 매끈한 피부가 맞닿았다. 10은 손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기지도 않았다. 피비는 그 미동 없는 반응을 읽으려는 듯 손가락으로 소매를 조금 문질렀다.
12 | "7은 그냥 해."
10 | "I gathered as much."(대충은 알겠어.)
12 | "6은 이상해. 너무 많이 봐."
10 | "That is the most accurate description of him I've heard all month."(이번 달 들은 6에 대한 평가 중 제일 정확하네.)
12 | "근데 체사레는 안 해. 만지지도 잘 안 해."
그 말이 떨어진 뒤 방 안의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게 더 조여졌다. 10의 오른손 검지가 단말기 모서리를 한 번 두드렸다가 멈췄다. 피비는 그 작은 움직임을 놓쳤고, 대신 자기 말의 구조를 계속 밀고 나갔다. 그녀에게 이것은 따지는 자리가 아니라 분류 작업의 연장선이었다. 사람마다 다르고, 체사레는 체사레대로 다르고, 그 다름의 이유가 궁금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궁금증은 다른 사람의 몸 안쪽을 열어 보려는 질문이 되곤 했다.
10은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기울였다. 예의 바른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말끝에 뼈를 심는 습관이 살아났다.
10 | "You're comparing me to Seven as if you're reviewing equipment."(장비 평가하듯이 나를 7이랑 비교하네.)
12 | "응."
10 | "Honest to the point of being offensive. Admirable."(불쾌할 만큼 솔직하네. 기특해.)
피비는 칭찬으로 받아들였는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 다음에는 더 대담하게 움직였다. 의자 팔걸이 옆으로 몸을 미끄러뜨리듯 들어오더니, 거의 10의 무릎 사이에 끼어들 듯 가까이 섰다. 그 움직임 자체는 익숙했다. 보호자에게 거리를 맡기는 동작, 제지당하면 멈추고 허용되면 더 붙는 동작. 다만 지금의 주제는 익숙하지 않았다. 10은 등을 기대고 있던 자세를 풀며 허리를 세웠다. 피비의 손이 이번에는 셔츠 앞섶 근처까지 올라왔다가 단추를 건드리지 못하고 멈췄다. 그녀도 반응을 보고 있었다. 전기 스위치를 찾듯, 어디까지가 괜찮은지.
12 | "왜 안 해?"
10 | "Because I don't do things merely because they're available."(손 닿는다고 다 하는 사람은 아니라서.)
12 | "난 available이야?"
10 | "You are a great many inconvenient things."(넌 여러모로 아주 성가신 쪽이지.)
직접적인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10다운 회피였다. 그러나 회피에는 언제나 결이 있었다. 피비는 말을 해석하는 대신 표정을 읽었다. 체사레는 대답을 비켜 갔고, 그 비켜 감 속에 약간의 주저함이 있었다. 그녀는 그 주저함을 특수한 감정으로 정의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벽에 머리를 박는 중은 아니라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피비는 조금 더 밀었다. 소파가 아니라 의자 옆,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녀는 허리를 숙여 10의 얼굴 높이에 시선을 맞췄다.
12 | "나 이상해?"
10 | "Yes."(응.)
12 | "더러워?"
10 | "No."(아니.)
12 | "귀찮아?"
10 | "Frequently."(자주.)
12 | "그럼 왜 방에 두는데."
이 질문은 모양만 단순했고, 안쪽은 그렇지 않았다. 10의 입술이 아주 조금 다물리는 모양이 달라졌다. 피비가 그의 방에 머무는 것은 우연과 습관과 보호의 연장선이었다. 처음에는 약 때문이었고, 그다음에는 불안정한 컨디션 때문이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설명이 줄어들었다. 누가 먼저 정한 규칙도 아니었다. 다만 피비가 눌러붙었고 10이 끝내 쫓아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뿐'이라는 말 안에 얼마나 많은 예외가 들어 있는지 그는 굳이 정리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10 | "Because throwing you out would create more work for me."(내보내면 일이 더 늘어나니까.)
12 | "거짓말."
10 | "You think so?"(그래 보여?)
12 | "응. 그 얼굴 진짜 아닐 때 알아."
그 말은 얄팍한 장난처럼 들렸지만, 실제로는 정확도가 높은 관찰이었다. 피비는 복잡한 논리를 못 따라가도 미묘한 온도 차를 몸으로 익혔다. 약이 오를 때의 사람, 약이 꺼질 때의 사람, 화를 참는 사람, 손을 뻗었다가 멈추는 사람. 10의 얼굴이 매끄럽게 붙여 놓은 것과 진짜 가까운 것의 차이를 그녀는 반복해서 보아 왔다. 지금의 체사레는 후자에 약간 기울어 있었다.
10은 짧게 웃었다. 소리보다 숨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그러고는 피비의 손목을 잡았다. 거칠지 않았지만 물러나게 만드는 힘이 분명했다. 자기 쪽으로 더 당기지 않고,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 세우는 식이었다. 손바닥 안쪽에 닿은 피부는 가늘고 따뜻했다. 맥이 조금 빨랐다. 약물 탓인지 방금의 대화 탓인지, 둘 다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10 | "Sit."(앉아.)
그가 가리킨 것은 자신의 무릎이 아니라 맞은편 소파였다. 피비는 한순간 의자를 내려다봤다가, 10의 얼굴을 다시 보고, 결국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시를 따르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말투가 조금 바뀌었기 때문이다. 장난이 빠지고 정리가 들어간 목소리. 피비는 그런 때엔 보통 따른다. 대신 입은 멈추지 않았다.
12 | "체사레는 나랑 자면 내가 망가질까 봐 안 하는 거야?"
10 | "No."(아니.)
12 | "그럼 체사레가 망가질까 봐?"
10 | "You're being annoyingly perceptive for someone who licks batteries of social logic at random."(사회적 논리라는 배터리를 아무 데나 핥는 사람치고는 짜증 나게 예리하네.)
피비는 뜻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뭔가 맞췄다는 것은 알았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곧 풀렸다. 그 승리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체사레는 여전히 건너오지 않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완전히 닫지도 않았다. 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고 차가운 물병 하나를 꺼냈다. 유리 표면에 맺힌 물기가 손등에 번졌다. 10은 컵에 물을 따르지 않고 병째 피비에게 내밀었다. 피비는 받아들고 바로 마셨다. 목이 움직이는 모양, 마른 숨 끝에 차가운 물이 들어가며 잠깐 어깨가 풀리는 변화가 드러났다.
10 | "Listen carefully."(잘 들어.)
12 | "응."
10 | "I don't sleep with you because everything around you is already unstable enough. Your body, your doses, your impulses, your comedowns. I have no interest in adding one more variable I can't cleanly account for."(너랑 자지 않는 건 네 주변이 이미 충분히 불안정해서야. 네 몸도, 약도, 충동도, 약효가 꺼진 뒤도 전부. 내가 깔끔하게 계산 못 하는 변수를 하나 더 얹을 생각은 없어.)
12 | "근데 7은 했어."
10 | "Seven and I are not built the same way."(7이랑 나는 구조가 달라.)
그 문장은 간결했지만 본질을 건드렸다. 7은 즉흥으로 밀고 들어가고, 10은 비용과 잔류를 계산한다. 7은 쾌락을 사건으로 만들고, 10은 사건이 남긴 흔적을 지우는 데 익숙하다. 피비는 그 차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둘이 다르다는 사실 자체는 알았다. 그녀는 병 입구를 입술에 문 채 잠깐 생각했고, 곧 또 직선으로 나갔다.
12 | "그래도 체사레가 만지면 좋을 것 같아."
방 안에 있던 작은 기계음들까지 한 박자 늦게 들리는 듯한 침묵이 왔다. 피비는 말하고 나서도 특별히 민망해하지 않았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다. 7의 손과 다른 감각을 예상한 것도 아니고, 사랑의 고백도 아니었다. 다만 체사레의 손이 머리카락을 말려 줄 때, 약을 주입할 때, 케이크 상자를 건넬 때, 셔츠 소매 끝을 잡았을 때와는 다른 식으로 닿으면 어떤지 궁금하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자기 궁금증에 가림막을 두는 법을 모른다.
10은 냉장고 문을 닫고 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뒤돌아선 채 한 손으로 목덜미를 짚었다가 내렸다. 셔츠 깃 아래 매끈한 피부가 손끝에 눌렸다가 풀렸다. 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방 한복판에 놓인 공기의 모양을 다시 정리하는 것처럼 느린 숨을 골랐다. 돌아봤을 때 얼굴은 거의 원래대로였다. 거의, 라는 정도로만.
10 | "And that's precisely why I keep my hands to myself."(그래서 더더욱 내가 함부로 손대지 않는 거야.)
피비는 물병을 무릎 위에 얹고 그를 올려다봤다. 이해와 불만이 동시에 지나가는 얼굴이었다. 체사레는 또 선을 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선을 긋는 이유의 일부를 보여 줬다. 그녀는 그 차이를 어렴풋이 느꼈다. 무조건적인 거절과, 이유가 있는 보류는 냄새가 달랐다. 피비는 그 냄새를 기억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잠시 뒤 피비는 소파에 옆으로 누웠다. 물병을 끌어안고 볼을 쿠션에 눌렀다. 방금 전처럼 다시 덤비지는 않았다. 대신 고개만 돌려 10을 봤다. 10은 책상 쪽으로 걸어가 단말기를 내려놓고, 커튼도 없는 벽 쪽을 잠깐 본 뒤 다시 그녀 쪽으로 돌아왔다. 움직임은 평소처럼 정돈되어 있었지만, 손끝의 리듬이 아주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다. 피비는 그 어긋남을 보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12 | "체사레는 이상해. 안 하는데 싫은 건 아니고. 밀어내는데 버리는 건 아니야."
10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소파 팔걸이에 걸친 담요를 집어 피비 다리 쪽에 덮어 놓았다. 정답도 오답도 아닌 행동이었다. 피비는 담요 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질문 하나가 닫히면 또 다른 질문이 생길 것이고, 체사레는 그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피할 것이다. 다만 오늘은, 피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그것만으로 피비는 충분히 새로운 것을 얻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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